You Have Been Defended RAW novel - Chapter (97)
너희들은 변호됐다-97화(97/641)
그로부터 사흘이 지나도록, 정영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간 태광에서는 하루에 한 번씩 재촉하는 전화가 왔지만, 나는 번번이 아직 의뢰인과 상의가 끝나지 않아 만남이 불가하다고 대답했다.
태광에서 전화 올 때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점점 젊어졌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리에게 연락하는 일이 너무 성가셔서 해당 업무를 아랫사람에게 계속 토스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예상대로라면 그들은 만나서 직접 논의를 하기 전까지는 소장을 제출하지 않을 것이기에 나는 정영준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그저, 정영준에게서 연락이 오기 전까지 태식이 얼른 조현석이 그 가방을 누구에게 선물하는지 확인하길 바랄 뿐이었다.
물론, 안타깝게도 그날 퇴근할 때까지 태식에게서 온 일일 보고 내역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지만 말이다.
오후 9시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베란다에서 야경을 내려다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차주한입니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정인아입니다. 정영준 씨 동생이요. 늦은 시간에 죄송하지만, 통화 가능하실까요?
“네. 괜찮습니다.”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다소 가라앉아 있었다.
확실히 정영준에게 무슨 일이 있긴 한 것 같았다.
-그때 강 변호사님이 오빠 데려다 주신 날, 그러니까 15일에요. 사무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정영준 씨한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오빠가 처음에 집에 들어와서 살기로 했을 땐 좀 괜찮았거든요. 병원도 다니고 하니까 더 괜찮아지는 것 같았어요. 근데 15일 날 이후로는 밥도 안먹고, 방 안에 틀어박혀서 술만 마셔요. 문도 안 열어 주고……. 새벽에 들어보면 방 안에서 울음소리만 나고…….
정인아는 점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까 문 엄청 두드려서 겨우 잠깐 얼굴 봤는데, 갑자기 그냥 새언니가 원하는 대로 아무 조건 없이 이혼할 거라고 하는 거예요. 상식적으로 억울한 사람이 그거 조사도 제대로 안 끝내고 이혼해 주고 다 끝낼 거라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대로 말했어요. 억울한 사람이 그러는 게 말이 되냐고, 나한테는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정말 억울한 거 맞냐고 그랬어요.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 말이, 정영준에게는 가족조차 자신을 믿어 주지 않는다고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우리 오빠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대체 오빠가 갑자기 왜 저러는 건지……. 사흘째 저러니까 부모님도 너무 걱정하시고, 정말 미치겠어요. 저러다 오빠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흑흑.
“…….”
-저러다 진짜 죽겠다고 할까 봐 걱정돼요. 오빠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변호사님은 아시죠?
나는 한숨을 쉬었다.
가족이 걱정할까 두려워 집에 들어가사는 것조차 고민했던 정영준이다.
내가 정인아에게 모든 사정을 말해도 되는 것일까.
잠시 고민은 되었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그녀는 알지 못하겠지만, 이미 정영준은 한 번 자살 기도를 했던 사람이다.
만일 사흘째 그런 상태라면, 또 그런 시도를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모든 사실을 안다면 정영준의 결정에 반대하고 나설 것이다.
누군가 정영준을 설득한다면, 그건 내가 아니라 그의 가족일 터.
그의 생각을 돌려놓으려면 정인아에게 털어놓아야 한다.
“고진아 씨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새언니요? 새언니가 오빠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 건가요?
나는 정영준에게 했던 설명을 그녀에게 되풀이했다.
한 번도 끼어들지 않고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던 그녀는, 그저 탄식만 낼 뿐이었다.
-……그러면, 오빠가 새언니 말대로 아니, 그 여자가 원하는 조건 대로 이혼하겠다고 할 것 같아서 집으로 돌려보내셨다는 말씀이시죠? 오빠는 사흘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서 생각하고 생각한 결론이 그거였고요.
“그렇습니다.”
-내가 속상해서 정말……. 어떻게 그런 년이 있을 수가 있어요? 아무리 남편보다 부모가 중요하다지만, 어떻게 사람 하나를 사회적으로 생매장시켜 놓고 그럴 수가……. 속상해, 진짜…….
정인아는 울고 있었지만, 그래도 냉정함을 잃지는 않았다.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저희 집에서도 오빠가 그 여자랑 결혼하는 거 반대했어요. 전 어렸을 때지만, 확실히 기억나요. 분명히 오빠가 그 집에서 냉대받을 줄 알았거든요. 특히 사돈어른, 아니……. 고상경이 결혼 반대한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요.
“음, 혹시 정영준 씨가 고진아 씨와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집안끼리 충돌이 있었습니까?”
-충돌이요? 제대로 본 적이나 있어야 충돌을 하죠. 결혼식 날 빼고는 그 집이랑 얼굴 본 적도 없었어요.
“7년 동안 말입니까?”
-네.
“고진아 씨도 못 보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명절 때나 봤었죠. 뭐, 그거 갖고 막 뭐라고 할 건 아니지만……. 솔직히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결혼한 해에 엄마가 저희 집에 오빠 생일상을 차린 적이 있었는데, 처가에서 못 가게 해서 못 왔었던 적도 있었거든요.
“그렇군요.”
정영준의 이혼 케이스에서는 이런 일이 그렇게 크게 작용하진 않겠지만, 소송 국면으로 접어들 경우 답변서에 넣을 만한 사안이었다.
나는 잠시 메모지를 찾다가, 급한 대로 신문지 귀퉁이에 짧게 적어 두었다.
-하……. 변호사님. 저 일단 오빠랑 얘기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이대로 억울함도 안 풀고 이혼한다는 건 말이 안 돼요. 제가 어떻게 해서든 오빠 생각 돌려놓을게요. 엄마, 아빠한테 말해서라도요.
“부탁드립니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오빠 상대가 많이 불안정해서 힘드셨을 텐데,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드려요.
“별말씀을요. 그럼 정영준 씨와 대화해 보시고 연락 부탁드립니다.”
-네. 늦은 시간에 죄송했어요. 편히 쉬세요.
나는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정인아가 오늘 연락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내일 정영준은 조사를 멈추고 이혼하겠다며 문자를 보내 왔을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그런 연락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간의 노력이 아까운 것은 둘째 치더라도, 맡은 사건이 그렇게 흐지부지 되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다음 날 오후, 정영준에게서 연락이 왔다.
사무실로 오고 싶다는 말에, 강 변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데리고 왔다.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정영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어제 늦은 시간에 동생이 전화드렸다고 들었습니다. 쉬고 계셨을 텐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어제 동생과 한바탕한 눈치였다.
“아닙니다. 동생분이 충분히 염려하실 상황이었고, 어차피 사무실에 있었습니다. 생각은 잘 해 보셨습니까.”
퇴근 이후라고 하면 쓸데없이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할 듯해서, 적당히 끊어 냈다.
“……네. 아무래도 제가 감정에 치우쳐서 저 혼자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정영준은 마른세수를 하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동생하고 부모님이 겪을 고통은 생각 안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부모님의 아들이라는 걸, 동생의 오빠라는 걸 주변 사람들도 모두 알 텐데. 제가 계속 변태라는 오명을 쓰고 있으면 그런 사람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이 안 좋게 보겠죠…….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강민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영준은 무릎을 꽉 쥐며 말했다.
“동생이 말을 안 해서 몰랐는데, 동생 같은 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제 비디오 얘기가 나왔던 모양이더라고요. 동생이 정영준이 일부러 그랬을 것 같지 않다고 하면서 과 친구들과 언쟁을 벌이다가, 네가 어떻게 아냐는 말에 자기가 정영준 동생이라고 해 버린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과 친구들도 동생을 좀 안 좋게 보는 눈치고…….”
정인아에 대해서 잘 알 정도로 많이 만났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라면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모님 역시 제 결혼식에 왔던 친척분들이나 주변분들과 좀 다투신 모양입니다. 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죠.”
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강민재는 그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마음 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더 빨리 사건을 해결해 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더 죄송합니다.”
“어휴, 아닙니다. 변호사님들이야 정말 잘해 주시고 계시죠.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 어차피 이혼해야 하는 거라면……. 전국민이 모두 알 수 있도록 제 억울함이 제대로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비디오만 유명해지고, 제 무고함은 묻히는…… 그런 일은 없도록 말입니다.”
굉장히 건강한 사고방식에 의한 결론이었다.
내가 가장 바라던 말이기도 했다.
“말씀드리지 못한 희소식이 있다면, 저희가 정영준 씨 비디오 속에서 다른 단서를 찾았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정영준은 반색했다.
사실 조현석의 애인을 찾아낸 다음에 말해 줄 생각이었지만, 그의 의지를 북돋아 줄 만한 화두를 던져야 할 것 같았다.
“조현석이 그 비디오를 찍을 때, 조현석의 애인이 함께 있었습니다.”
“여자 친구요?”
“네. 그리고 그 애인이 누구인지 찾을 만한 단서가 나와서, 저희 조사원이 지금 찾고 있습니다. 조현석이 정현준 씨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을 애인이라는 이유로 그 자리에 데려가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조현석의 애인도 고상경 회장과 연관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겠네요. 상관도 없는 사람을 굳이 그 난장판에 데려왔을 리도 없으니…….”
“아마 정영준 씨의 비디오를 잘 찍고있는지 확인도 할 겸 해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 방면으로 조사를 이어오던 중이었습니다.”
정영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일 누군지 찾기만 한다면 정말 입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다만…….”
“…….”
“지금 고진아 씨 측 변호인단이 끈질기게 만남을 요청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루에 한 번씩 독촉 전화가 와서, 계속 피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한결 밝아졌던 정영준의 표정이 다시 굳어졌다.
그러자 강민재가 손을 마구 저으며 말했다.
“정영준 씨가 직접 가셔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끼리 다녀와도 됩니다. 불편하시다면 굳이 만나실 필요 없습니다. 정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정 원하셔도 저는 정영준 씨가 그 자리에 나가시는 걸 그리 긍정적으로 보진 않습니다.”
내가 그의 말을 자르며 말하자, 강민재는 나를 향해 괴팍한 표정을 지으며 무언의 항의 표시를 했다.
하지만 나는 외면했다.
그 자리에 정영준이 나갔다가 고진아를 만나면, 또 그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능하다면 변수는 통제해야 한다.
“변호사님이 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 알겠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제가 그 자리에 가 봤자, 도움은커녕 일을 그르치기만 할 겁니다.”
몹시 자존감이 낮아 보이는 발언이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일을 그르치는 것도 그르치는 것이지만, 어쨌든 정영준이 힘들게 마음을 잡았는데, 그 의지가 흔들리면 곤란하다.
“그럼 고진아 씨 측과 날짜를 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