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Two Will Give Birth To Me In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6)
두 분은 훗날, 저를 낳습니다 (16)화(16/207)
“꺄.”
나는 작은고모의 품에 안긴 채 손을 뻗었다.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귀부인은 내 행동을 보고 눈꼬리를 휘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내 작은 손바닥 안에 엄지를 쥐여주었다. 난 손가락을 맞잡고 흔드는 것으로 얼추 악수를 대신했다.
작은고모가 크면 이런 얼굴이 될까? 모든 행동에 기품이 묻어나오는 이 귀부인은, 우리 큰고모였다. 미래에선 국외로 추방당하신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무척 오랜만에 만나는 거였다.
“젠, 인사해야지.”
“안녕…….”
고모의 치마폭에 숨은 내 사촌도 쭈뼛거리며 인사했다.
황궁에 온 지도 벌써 두 달, 이로써 가족들을 전부 만나본 셈이었다. 몸이 편찮으신 할아버지는 얼마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직접 뵌 건 처음이라 신기하고 반가웠지. 강인하고 지적인 인상이셨다.
“그런데 파리엘은 어디 있어? 얼굴을 보이질 않네.”
큰고모의 물음에 주위가 조용해졌다. 나 또한 어색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파리엘은 한 달 전, 방을 착각해서 내가 그와 맞닥뜨렸던 날 이후로 두문불출했다. 시종들도 줄기차게 들락거리던 황자가 그날부턴 태양궁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고 수군거렸다. 아마 출입금지 처분을 받았거나, 아빠 눈치를 보느라 못 오는 것 같았다.
‘만나질 못하니까 뭘 해볼 수가 없네.’
소피아가 세례를 내려주었던 방식에 실마리를 찾은 것 같아 혼자 경탄하던 것도 잠시. 난 지난 한 달 동안 파리엘의 머리털 끝도 만나지 못했다. 언제 파리엘을 만나게 될지 모르니까 열 일 제치고 열심히 신성력을 회복해 놓긴 했는데. 이래서야 써먹을 날이 오긴 할까.
“왜 다들 대답이 없어?”
큰고모님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녀의 시선은 방 안의 사람 중 가장 유력한 책임자인 우리 아빠를 향하고 있었다.
아빠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비서관과 함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고개를 든 그는,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왔네.”
그리고 한 박자 뒤에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난 움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의 사람들 또한 일제히 문을 바라봤다. 시종이 아빠의 손짓에 따라 문을 열자, 근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막내.”
큰고모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무리 봐도 구박데기 사생아를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아빠도 꽤 무른 편이셨고 작은고모도 그렇고, 우리 가족들은 파리엘을 꽤 아끼는 것 같았다. 하긴, 사생아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나도 고모에게 전해 듣기 전까진 몰랐을 정도니까.
쭈뼛거리며 들어온 파리엘은 고모를 향해 다가가면서도 시선은 아빠를 향했다. 아빠는 서류를 테이블에 놓고 일어났다.
“파리엘.”
“……형님.”
“네가 한 말은 잊지 않았겠지.”
파리엘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분위기를 살폈다.
뭔진 몰라도 내가 모르는 사이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대화가 오갔던 모양이었다. 파리엘이 아빠에게 진심 어린 사과라도 한 걸까?
‘자존심이 강해 보였는데.’
첫 만남부터 옹알이나 하는 아기에게 그렇게 빈정거린 것도 그렇고, 나를 시종장에게 던져버린 것도 그렇고. 절대 보통 성격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나일 것이다.
신성연합국에서 신성력은 신분보다 중요했다. 모두들 누가 하급사제고 누가 상급사제인지 알고 있었고 신전의 계급이 세속의 신분에 비해 낮은 사람에게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은 표하지 않았다. 그게 옳다고 여겨졌다. 신성제국에서 신성이 없는 황족으로 살아가는 것. 그건 아마 마녀로 의심받는 신성 황제로 살아가는 것과 비슷하겠지.
고장 난 인간이라는 꼬리표는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그를 깊은 박탈감과 자격지심의 수렁으로 몰아갔을 것이다. 그가 원래라면 들어갈 수 없었을 성기사단에 입적해, 전장에서 생을 마감한 것도 그런 감정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파리엘이 조금만 더 살았으면 소피아를 만나 성흔을 얻고 그녀의 추종자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소피아가 나타나기 전 19살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다. 삼촌은 날 안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가족인데 또 그렇게 슬픈 죽음을 맞도록 내버려 둘 순 없었다.
난 파리엘을 향해 힘껏 손을 내저었다.
“꺄아!”
“어어.”
날 안고 있던 비올라 고모가 당황한 듯 나를 더 꽉 붙잡았다. 하지만 난 굴하지 않았다.
“뺘아아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파리엘을 내가 찾으러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나는 수치를 무릅쓰고 마구 발버둥을 쳤다.
“얌전하던 애가 갑자기 왜 이러지?”
큰고모도 어리둥절하게 날 돌아봤다. 작은고모는 날 부둥켜안은 채 파리엘에게 말했다.
“너 부르는 것 같은데?”
“나?”
파리엘이 혼란스럽게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더니, 반사적으로 아빠를 돌아봤다. 갑자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나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아빠는, 파리엘의 시선에 잠깐 망설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파리엘은 얼떨떨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뻣뻣한 자세로 앞에 선 파리엘에게, 나는 손을 휙휙 휘저었다. 파리엘은 어떻게 신호를 알아들었는지 내게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져아.”
난 그의 이마로 손을 뻗었다.
소피아가 세례를 내리는 모습을 본 건 두 번뿐이지만, 그녀도 이런 식으로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요한이 세례를 받을 때도 신성이 이마로 모였고. 성흔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아마도 이 부근에 위치하는 게 아닐까.
내 손끝이 파리엘의 이마에 톡 닿았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파리엘과 시선이 마주치자, 눈을 감고 맞닿은 손끝에 신성을 모았다.
어려운 것도 없었다. 이건 내가 정말 자주 하는 행동이니까. 나는 비밀통로의 입구에 들어설 때마다 신성으로 된 문양을 만들었다.
신성은 원래 눈으로 볼 수 없는데, 한 번에 많은 신성력을 사용하면 하얀빛을, 거기서 한 단계 더 올라가면 금색빛을 냈다. 난 일전에 요한이 세례를 받을 때 봤던 문양을 떠올렸다.
신성으로 특정한 문양을 만들면 열리는 문. ‘마력을 응집시키는 성질’을 가진 마법진을 그리는 잉크 세피아. 어쩌면 이 둘의 원리는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신전에는 마법진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눈에 보일 정도로 많은 신성을 응집시켜서 문양을 만들어내는 거야.’
신성진이라고나 할까.
진짜 성녀인 소피아도 세례를 내려준 날은 기진맥진하곤 했다. 성녀도 아닌 나는 그보다 훨씬 힘내야 할 것 같아, 그간 모아둔 신성력을 파리엘에게 모조리 쏟아내듯 퍼부었다.
“어, 무슨…….”
비올라 고모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슬며시 눈을 뜨자, 내 손끝에서 황금빛 신성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내 눈이 동그래졌다.
딱 하나, 교황의 어깨 너머로 얼핏 봤을 뿐인 빛의 문양을 똑같이 그려낼 수 있을지가 유일한 불안이었다. 그런데 파리엘의 이마 위로 쏟아붓자 그것이 자연히 뭉치면서 문양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오.’
뭔가 될 것 같은 느낌에, 난 마지막 신성력까지 짜냈다. 그러자 빛의 문양이 점점 또렷해지더니 파리엘의 이마 위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저건…….”
이마 위에 뜬 문양을 본 아빠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 함께 요한의 세례를 지켜본 것이 바로 어제 일이었으니까, 다들 저 문양을 기억할 것이다.
“아.”
이마의 빛이 모두 사그라들자, 파리엘은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뒤로 풀썩 넘어졌다. 놀란 큰고모가 그의 팔을 잡았다.
“파리엘! 괜찮니?”
“네?”
파리엘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제 이마를 더듬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비올라.”
“응?”
그때 아빠가 작은고모의 곁에 다가와 내게 손을 뻗었다. 고모는 얼결에 아빠에게 나를 넘겼다.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자, 예의 그 별세계 생물을 보는 듯한 눈이 시선을 맞춰왔다.
“…….”
“…….”
난 아빠를 사랑하지만 이렇게 예리한 눈으로 바라보시면 조금 살 떨리는데.
아빠는 손을 들어서 나를 살피듯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진지하고 엄숙한 눈빛에 덩달아 약간 긴장하여 아빠를 마주 봤다. 길쭉한 손가락이 내 얼굴을 더듬다가 볼을 가볍게 잡더니, 쭉 잡아당겼다.
“엥.”
난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러자 탱탱한 볼이 더 늘어났다.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성자이신 아빠가 뭔가 느꼈나 했더니 내 얼굴 가지고 장난치는 게 목적인 줄은 미처 몰랐다. 괜히 긴장했던 게 허탈해졌다.
‘지금 아빠는 18살이니까 아직 철이 덜 들 나이시기는 하지.’
너그럽게 이해하자고 마음먹고 있는데, 아빠가 문득 입을 열었다.
“파리엘.”
고모의 부축을 받고 일어난 파리엘이 부름을 받고 우리를 돌아봤다.
“이리 와 봐라.”
파리엘은 아직도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순순히 아빠의 말을 따랐다. 긴장한 걸음으로 다가온 파리엘이 어색하게 서서 아빠를 올려보았다.
“아기를 안아보고 싶다고 했지.”
“네? 아뇨, 그건…….”
“안아봐.”
“네?”
한 달 전 소동 뒤로 아빠는 내게 보호의 성물을 하사했다. 그래서 성흔이 없는 사람은 감히 내게 손을 댈 수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파리엘도 나를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말없이 그의 품에 나를 밀어 넣을 뿐이었다. 그 서슬에 파리엘이 천천히 내게 손을 뻗었다. 불안과 묘한 기대가 범벅이 된 얼굴로, 나를 받아 안을 때까지 보호의 성물은 발동하지 않았다.
“어떻게…….”
여기저기서 놀란 목소리와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류를 정리하던 비서관이나 대기하던 시종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놀란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제 생각엔, 어쩌면…….”
사람들의 웅성거림에 유모가 더듬거리며 답했다.
“아기님이 전하에게 세례를 내리신 것 같아요.”
“뭐? 그런 건 불가능해.”
“하지만 아까 그건, 성흔이 생길 때 나타나는 현상인걸요.”
큰고모는 몹시 당황한 기색으로 파리엘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파리엘, 그게 정말이니?”
사람들이 격양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거나 그를 다그칠 동안, 파리엘은 얼떨떨한 얼굴로 나와 내 목에 걸린 성물만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때, 아빠가 조용히 손을 뻗어 내 목걸이 끝에 달린 성물을 잡아 파리엘에게 건넸다.
“선물교본에서 본 내용, 기억하지.”
아빠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와 꽂혔다. 선물교본은 정식 사제들이 성물이나 성검에 대해 교육받을 때 쓰는 책이기 때문이다. 성흔도 없는 파리엘이 그 책을 읽었다고?
파리엘은 주저하다가 마음을 먹은 듯 보호의 성물을 손에 쥐었다. 아빠와 눈을 맞춘 채, 집중하듯 미간을 좁혔다. 난 단번에 깨달았다.
‘정말 신성을 불어넣고 있구나.’
곧 성물이 작게 진동하며 하얀빛을 내자, 큰고모가 입을 감싸며 뒷걸음쳤다. 성흔이 생겼다는데 신성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었다.
“내,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나?”
“아닌 것 같아요, 전하.”
‘다행이다.’
난 놀라움과 뿌듯함이 섞인 눈으로 파리엘을 올려봤다. 파리엘의 녹색 눈동자는 반짝이는 성물을 반추하며 하얗게 빛났다.
큰고모는 침착을 잃고 신관을 불러오라고 외쳤고, 시종들은 혼란스럽게 문을 열고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동요할 줄 알았던 파리엘은 의외로 차분한 반응이었다.
때마침 파리엘이 날 돌아봤다. 눈이 마주치자 움찔 놀라 시선을 피했는데.
“……흑.”
머리 위에서 들리는 흐느낌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파리엘은 울고 있었다.
“흐윽, 끅.”
펑펑 울 줄도 모르고 어깨를 떨면서.
그 모습을 보자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얼마나 절실했으면 그랬을까.
첫 만남은 최악이었지만, 그 애는 그저 남들과 다르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빠, 저는 정말로 마녀예요?’
과거의 내가 그랬듯이.
그가 느꼈을 소외감과 공포를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맘속으로 그를 꼭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