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Two Will Give Birth To Me In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180)
두 분은 훗날, 저를 낳습니다 (176)화(180/207)
***
“…이브….”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억지로 눈을 뜨자 나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흐릿한 시야를 깜빡이며 두어 번 기침했다. 모래를 삼킨 것처럼 입과 목 안이 따끔거렸다.
“정신이 듭니까?”
니르겐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눈을 굴렸다.
분명 아침이었는데, 사방이 어두컴컴했다.
우리는 바위가 맞물리면서 생긴 좁은 공간에 쓰러져 있었다. 절묘하게 바위가 바위를 받쳐주어서 압사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한 모양이었다.
사방은 모조리 토석으로 가로막혀 있고, 니르겐의 등 뒤로 커다란 바위와 쓰러진 마차가 보였다. 마차는 넘어진 것 외에는 크게 훼손이 없었다. 진을 비롯한 두 소녀의 마력이 선명히 느껴지는 걸로 봐선 다행히 아이들도 무사한 듯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니르겐도.”
니르겐도 괜찮나요, 라는 물음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목과 앞섶에 얼룩진 붉은 피가 보였다.
“니르겐!”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니르겐이 내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그의 축축한 가슴팍에 손을 대는 순간 머리에 핏기가 가시는 기분이었다.
“저, 저를 감싸다가 다친 거예요?”
내 물음에 니르겐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이렇게 피, 피를 많이 흘리는데 어떻게 별게 아니에요!”
나는 허겁지겁 니르겐의 겉옷 단추를 끌렀다. 나를 올려다보는 니르겐의 눈이 약간 커졌다.
“이브, 결혼도 안 한 총각 옷을 멋대로 벗기시면 벌 받습니다.”
“농담할 때예요?!”
나는 울먹이며 니르겐의 셔츠를 풀어 헤쳤다.
무속성인 나의 권능은 보잘것없었으나 최선을 다하면 지혈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니르겐은 이미 내가 마녀인 것을 알고 있었으니, 내가 권능까지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한들 상관없었다.
하지만 피로 얼룩진 옷과 달리, 들여다본 니르겐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탄탄한 복부와 가슴팍 어디에도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디서 피가…….”
상처를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나를 보며 니르겐이 뜬금없이 물었다.
“이브, 혹시 기억하십니까? 제 수명이 한 달 남았다고 말한 것.”
“네?”
당연히… 기억하기는 했다.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잊겠는가. 니르겐이 시한부라는 이야기를 들은 당시에는 혼자 며칠 동안 눈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는데.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최근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간 본 니르겐의 움직임이 건강한 보통 인간 이상으로 뛰어났기에, 시한부라는 말 또한 새빨간 거짓말이리라 혼자 내심 추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니르겐은 뭐든지 능수능란하고 나는 인간관계에 서투니까, 내가 바보같이 그의 농담에 속아 넘어간 것이라고.
어쩌면 농담이라 믿고 싶어서 더 그렇게 생각한 걸지도 모르겠다.
“이브를 감싸느라 다친 게 아닙니다.”
니르겐은 느긋한 목소리로 말하며 내 손등 위로 포개졌다.
“제 수명이 다 되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떻게…….”
나는 입술을 덜덜 떨면서 말했다.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이브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니르겐의 목소리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태연했다. 니르겐이 그럴수록 내 목소리는 더욱 형편없이 떨렸다.
“아직 한 달이 안 됐잖아요…….”
“이, 이브.”
시한부라는 말이 사실이었을지라도, 아직 한 달까지는 시간이 남았다. 니르겐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건 나를 구하러 와서임이 틀림없었다.
울음이 울컥 목을 비집고 올라오자, 니르겐이 당황한 얼굴로 내게 손을 뻗었다.
“당신이 미안해할 일이 아닙니다. 이건 뭐랄까, 제가 혼자 혀를 씹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니까.”
“무슨 말이에요, 그게…….”
“신경 쓰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보다는.”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그는 쉼 없이 손으로 닦아주면서 속삭였다.
“마탑의 대마녀가 일 년에 한 번 나샤에 출몰한다는 이야기, 기억합니까?”
“네?
나는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마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 나누었던 대화를 말하는 것 같았다. 밤부스의 숲에서 첫 의뢰를 했던 날, 나는 그에게 마탑에 가는 방법이나 마탑의 마녀를 만날 방법이 있는지 물었었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정보 길드가 마탑에 갈 루트를 찾을 수 있는지 검증해서 엄마와 마탑의 안전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엄마를 슬쩍 만나고 오고 싶다는 사심도 약간은 있었다.
하지만 니르겐이 아직 그 의뢰를 신경 쓰고 있는지는 몰랐는데.
“이 아랫마을이 그곳, 마젤란입니다. 당신이 찾던 마탑의 마녀가 거기에, 쿨럭…!”
“마, 말하지 말아요, 니르.”
니르겐이 토해낸 피가 옷을 적셨다. 죽음을 앞두었으니 고통스러울 만도 한데, 니르겐은 기침 때문에 말이 막힌 게 성가신 것처럼 인상만 조금 찌푸릴 뿐이었다. 턱을 타고 흐르는 피가 아니었다면 평소와 다른 점이 없다고 느껴질 만큼.
그래서 그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더 힘들었다.
나는 그의 몸에 대고 치유의 권능을 발했다. 내 신성이 그를 조금이라도 낫게 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니르겐은 조금도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아빠가 돌아가시던 날이 떠올라서 손끝이 떨렸다.
“말려들게 해서, 죄송합…….”
“왜 자꾸 사과하는 거예요.”
“시간이…….”
그가 아쉬운 것처럼 속삭이며 여전히 뺨을 적시고 있는 내 눈물을 훔쳤다.
“전혀, 울 필요가, 없…….”
“안 돼요, 니르겐.”
니르겐은 내 손을 잡고 눈을 맞춰왔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아로새기려 애썼다.
“다시, 만나면…….”
갈수록 니르겐은 모든 게 느려졌다. 언제나 빠르고 명확하던 목소리도, 눈을 깜빡이는 속도도.
느릿느릿 감기던 야속한 눈꺼풀이 기어코 눈을 맞춰주던 붉은 눈동자를 완전히 감추어버렸다.
“니르겐?”
“…….”
“니르, 대답 좀 해줘요…….”
나는 아직 온기가 남은 손을 잡고 반복해서 니르겐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예쁜 눈동자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구구구구…….
그때, 또다시 땅 밑이 진동했다.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한기를 느꼈다. 고개를 들자 쓰러진 마차와 바위로 막힌 사방이 눈에 들어왔다.
“안 돼.”
팔을 뻗어 앞을 가로막은 바위를 손으로 더듬었다. 나름대로 용을 쓰며 밀어내 보았지만, 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사이 땅울림이 거세졌다.
“읏……!”
나는 중심을 잃고 철푸덕 쓰러졌다. 진동하는 바닥에 엎어진 채로 시선을 들었다.
덜컥, 덜컥.
머리 위로 절묘하게 맞물려 있던 바위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쿠구구궁!
위태롭게 흔들리던 아귀가 어긋나는 순간, 바위가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안 돼……!”
나는 다급히 몸을 던져 미동 없는 니르겐을 감쌌다. 실체화된 마력을 위로 뻗어 바위를 지탱하려고 했으나.
“아우으……!”
위로 뻗어나간 까만 마력은 바위에 부딪히는 순간 힘없이 허물어졌다.
내게 남은 힘은 터무니없을 만큼 작고, 부족했다.
나는 절망감을 느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아가야.”
그러나 다음 순간, 몸 위로 포개진 것은 날카로운 바윗돌이 아니라 따뜻한 온기였다.
희미하게 비치는 시야로 분홍색 머리카락이 드리웠다.
‘…주마등인가?’
그 순간 니르겐이 남긴 말이 떠올랐다.
이곳에 내가 찾던 마녀가 있다던 그의 속삭임이.
***
“으으…….”
누군가의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는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지끈거리는 두통이 조금씩 경감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손길이 쓰다듬는 것을 멈추고 나를 떠나가려 했다. 나는 무의식중에 팔을 뻗어 그 손을 덥석 잡았다.
“우으응…….”
“아가, 어디 아프니?”
그러자 누군가가 조급한 투로 내게 물어왔다.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는 애정과 온기가 잔뜩 묻어나 있었다.
‘엄마?’
반사적으로 익숙한 이름을 떠올렸다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사이가 좋던 시절에는 마탑에 갈 때마다 엄마가 살가운 미소와 함께 아가야, 하고 불러주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옛일이었다. 간신히 만든 유대를 내 손으로 모조리 끊어내 버렸으니.
‘아, 꿈이구나.’
상황이 끔찍하게 흘러갈 때마다 환상과 꿈으로 회피해버리는 것은 나의 오래된 생존법이었다. 이 습관은 현실을 조금도 나아지게 만들지 못했지만, 그걸 외면할 만큼 안온하고 포근했다.
“대마녀니… 이부 와써요.”
나는 옛날처럼 어리광을 부리며 내가 만들어낸 환상의 손에 뺨을 비볐다.
그런데 내 뺨이 닿자 손이 흠칫 굳는 게 느껴졌다. 마치 놀란 것처럼.
환상이 놀라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의구심을 느끼고 눈을 떴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내 입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라……?”
하얀 어깨 아래로 굽이치는, 나와 같은 색의 머리칼. 염려를 담고 나를 살피는 보석 같은 눈동자.
남색 원피스에서는 짙은 포도주 냄새가 나고 눈 밑은 살짝 까칠해 보였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진짜 엄마가 거기에 있었다.
엄마는 굳은 입매를 끌어올리며 내게 인사했다.
“안녕, 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