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Two Will Give Birth To Me In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37)
두 분은 훗날, 저를 낳습니다 (37)화(37/207)
잠결에 아빠가 일어나려고 하면 손을 뻗었던 기억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 손을 맞잡아주던 따뜻한 감촉도. 그래서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상체를 일으키며 옆자리로 손부터 뻗었다. 하지만 옆은 텅 비어 있었다.
‘꿈이었나?’
나는 몽롱한 눈을 깜빡이며 빈자리로 풀썩 엎어졌다. 이불 안으로 손을 넣자, 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따끈따끈…….’
“일어나셨어요?”
때마침 유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전하는 방금 막 나가셨어요.”
“아…….”
꿈이 아니었구나.
나는 다시 빈자리를 돌아봤다. 낮고 푹신한 어린이용 침대는, 나에게야 연무장처럼 넓었지만 아빠는 다리를 완전히 펴지도 못했을 것이다. 좁은 침대에서 불편하게 움츠리고 앉아 나를 토닥여 주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만 일어날라치면 귀신같이 칭얼거리며 손을 뻗는 나 때문에 옴짝달싹 못 했을 그를 상상하니 미안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왜 그랬지? 잠결이라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푹 주무셨어요?”
그때 유모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고개를 들자 걱정스럽게 나를 살피는 유모가 보였다.
“어제는 계속 잠을 설치셨잖아요.”
‘아, 알고 있었구나.’
생일에는 내 실수에 대해 고민하느라 잠을 못 잤지. 뒤척이는 티는 안 냈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멋쩍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머리가 개운했다. 나쁜 꿈도 안 꾸고 푹 잔 것 같은 기분.
“웅, 푹 자떠.”
“다행이네요.”
내 대답에 유모가 흡족하게 웃었다. 고작 내가 잘 잤다는 말에 기뻐해 주다니, 유모는 정말 선량하고 좋은 어른이다.
식사 중에 유모가 아빠와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자꾸 물어봐서, 나는 더듬더듬 있었던 일을 풀어놓았다. 원체 말주변이 없는 데다 발음도 어눌해서 그렇게 재밌게 말하지도 못하는데 유모는 흥미진진하게 눈을 반짝였다. 그러면서 머쓱해진 내가 ‘아인 성하가 다정해서 그래.’라든가 ‘성하가 따뜻한 분이셔서.’라고 말할 때마다 재밌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호호 웃었다.
“전하께서 다정한 분이시긴 하죠.”
“마져.”
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유모가 기특하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아실이 방문해서, 언제나처럼 다 함께 산책을 나갔다. 맑은 하늘과 지저귀는 새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 정원을 가득 채운 색색의 꽃들이 오감을 풍요롭게 했다.
‘언제나처럼 평화롭네.’
그리고 나는 새삼 그 ‘언제나’라는 감상이 얼마나 배부른 것인지 생각했다. 나를 싫어하지 않는 사람과 자유롭게 땅을 거닐며 평온을 만끽하는 걸 일상으로 느끼게 됐다니. 나 개인의 영달을 위해 시간을 되돌린 것은 아니지만…….
‘……마력을 회복할 때까진, 체력 단련도 필요하니까.’
“오늘은 화관을 만들어 드릴까요?”
“녜에.”
“그럼 함께 화관에 넣을 작은 꽃들을 찾아보세요.”
유모의 말에 나는 아실의 손을 잡고 풀밭으로 갔다. 토끼풀들을 찾으러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거리가 좀 있어서 인사를 나눌 정도는 아니었다.
“저기…….”
그런데 풀밭에 쭈그리고 한창 노닥거리고 있을 때, 테이블에 있던 하인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귀여운 녹갈색 눈에 키가 크고 체격이 좋은, 신입 하인 겐틀리였다. 무슨 일인진 몰랐으나 인사를 하려고 손을 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겐틀리가 다짜고짜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손을 든 자세 그대로 굳고 말았다.
‘뭐, 뭐지?’
마침 정원을 지나가던 비올라 고모와 그녀의 시종들이 어리둥절하게 이쪽을 바라봤다. 당황한 내가 왜 그러냐고 묻기도 전에, 겐틀리가 자진해서 고백했다.
“이브엔나님의 생일에 깜짝 파티를 하자고 제안한 건, 저였어요.”
***
겐틀리는 내게 정황을 설명해주었다. 내 생일 파티 방식을 회의하는 가운데서,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서 열심히 의견을 개진했는데 그중 하나가 깜짝 파티였단 이야기를.
나는 가만히 설명을 듣다가 궁금해져서 물었다.
“금데 그 얘기는 어서 해써?”
“바로 저기에서요.”
겐틀리는 온순한 태도로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정원 한가운데의 테이블…… 그림자라곤 없네.’
저런 데서 이야기를 나누니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못 잡았지. 사람들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다고 오해해서 도주하던 때를 떠올리자 좀 허탈해졌다.
“죄, 죄송해요, 성녀님. 제가 괜히 그런 걸 제안해서…….”
내 반응을 뭐라고 해석한 건지, 겐틀리가 재차 사과했다.
“다들 성녀님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무서워하신다고 말씀해줬는데, 제 불찰입니다.”
‘……다른 건 상관없는데, 왜 다들 내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걸 무서워한단 사실을 아는 거야?’
그동안 소피아를 열심히 따라 해왔는데 내 노력이 전혀 와닿지 못한 걸까? 나름대로 사교적이고 활발한 아이로 비치고 있다고 믿었는데 모두 나만의 착각이었다. 애초에 일상을 연기하겠다는 계획부터가 불가능한 도전이었던 거다. 그간 느꼈던 뿌듯함이 갑자기 민망해져서 나는 스르르 고개를 떨궜다.
“안니야…… 이부는 개차나써.”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겐틀리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굽힌 허리를 펴지도 않고 말했다.
“하지만 부담스러워하셨잖아요?”
“쪼, 쪼끔 그러킨 하지만서도…….”
나는 그날의 모습을 떠올렸다. 화려하게 꾸며진 방, 잔뜩 손에 얹어주고 간 선물들과 쏟아지던 생일 축하한단 말들을. 비록 나는 그 속에서 약간 움츠러든 채 쩔쩔매기만 했지만…….
“그래두 모두 조아해.”
이것만은 분명했다. 다들 정말 좋은 사람들이니까. 조금 무섭고 많이 고맙고. 불안하게 콩닥거리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졌었어.
“이브님…….”
“이브엔나…….”
그런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묘하게 겹쳐서 들렸다.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들자, 어느새 방금까지 저 멀리 있었던 모든 이들이 내 앞에 다가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베일리와 하인들, 유모와 아실, 심지어 길을 지나던 비올라 고모까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어, 언데부터.”
“이브님!”
겐틀리가 내게 와락 달려들자, 베일리가 껄껄 웃으며 그의 옷을 잡아당겨 막았다. 그사이 비올라 고모와 아실, 유모가 나를 껴안았다.
난 사람들에게 폭삭 둘러싸인 채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우리 예쁜 이브, 매일 좋은 일만 생기게 해줄게.”
그때 왼편에서 나를 안아주던 비올라 고모가 내 머리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순간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아, 맞아.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과거로 온 건 아니지만…….’
날 과거로 보내준 사람들은, 조금 행복해한다고 나를 혼내지는 않겠구나.
스르르 시선을 돌리자, 겐틀리에게 헤드락을 걸고 있던 베일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다급히 겐틀리를 놓아주며 수더분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도.이.브.님.과.있.는.시.간.이.좋.습.니.다!”
“부요리장님 말투가 왜 그래요? 진짜 이상해요.”
겐틀리가 딴지를 걸자 베일리가 그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유치한 투닥거림에 비올라 고모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베일리와 주방 식구들의 저 과하게 고운 말투는 역시, 날 위해서겠지…….’
내가 어른들이 나누는 험한 말투를 듣고 배웠을까 봐. 좋은 말만 듣게 해주려고.
나는 오랫동안 입에 붙어버린 모진 욕설들을 돌이켜 보았다.
남에게는 감히 입도 벙긋 못할 말들을, 나에게만 퍼붓고.
스스로를 할퀴면서도 그게 나쁘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베일리는 나를 위해 이렇게 노력해주는구나. 베일리뿐만이 아니었지. 황궁 사람들 모두가 내게 늘 친절하고 부드러웠었어. 내가 좋은 것만 누리길 바라서…….
어색한 손짓으로 밤새 나를 토닥여주던 아빠가 떠올랐다.
나는 과거로 와서 소피아를 연기하며 사람들의 애정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아쉽게도 소피아를 따라 하는 건 실패한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날 걱정해줄 정도로는 열심히 살았구나.
‘그래, 이 버릇은 고쳐야겠어.’
“뻬리, 이상해.”
“헉, 저, 정말요?”
“봐요, 이브님도 이상하다고 하잖아요!”
겐틀리가 억울하게 소리치자, 베일리는 멋쩍게 뒷머리를 쓸었다. 하지만 내가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자 그도 나를 따라 웃었다.
난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그들의 온기를 받으며 다짐했다.
당장 버릇을 없애는 건 힘들겠지만, 적어도 천천히 노력해 가야지. 더 이상 내게만 모진 말을 퍼붓는 건 그만두자.
이젠 혼잣말을 하지 않아도, 이렇게 내게 말을 건네주는 사람들이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