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Two Will Give Birth To Me In The Future RAW novel - Chapter (40)
두 분은 훗날, 저를 낳습니다 (40)화(40/207)
마지막으로 리벨리우스 황자까지 등장하며,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팽팽한 활대가 첼로의 네 현을 그으며 높은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점찍어둔 파트너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유려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서 남녀들은 귀족식 예법대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짝을 지었다. 태엽 장치의 계산식대로 움직이는 오르골처럼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춤을 시작한다. 위층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비치는 것은, 규격에 맞춰 놓인 튤립들이 회전하며 꽃잎을 펼치는 듯한 모습.
그 하나같이 잘 다듬어진 귀족들 가운데에서도, 유독 눈을 사로잡는 이들은 있었다.
“와, 저기 봐요.”
“정말 예쁜 한 쌍이네요.”
“부러워라…….”
어디서나 관심과 선망의 대상인 아인츠베른은, 린드벨의 여동생 라일라와 첫 춤을 추었다. 아인츠베른의 손이 허리를 감자 오빠를 닮아 홍염처럼 붉은 눈이 살짝 흔들렸다. 고개를 숙여서 감춘 얼굴은 아인츠베른이 보지 못하는 사각에서 발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바짝 긴장한 라일라의 높은 힐이 아인츠베른의 발등을 밟았다.
“죄, 죄송해요.”
“괜찮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답하던 아인츠베른은, 시야 언저리에 들어온 분홍색 머리에 흠칫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엘리자베스가 환하게 웃으며 파트너와 왈츠를 추는 모습이 보였다.
아인츠베른의 잇새로 허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바보 같군. 이브엔나가 여기에 올 리가 없는데.’
이브엔나를 키운 이후부터 분홍색 머리통만 보면 반응하는 이상한 특성이 생겨버렸다.
‘이브엔나는 똑똑하고 얌전한 아이인데도 이럴 정도라니. 사고뭉치를 키우는 부모들은 신경 쇠약에 시달리겠군.’
그는 육아로 힘들어하고 있을 모든 양육자의 노고에 마음 깊이 공감하며 긴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슬쩍 고개를 들었던 라일라가 때마침 그 모습을 목격하곤 재차 아인츠베른의 발을 밟았다.
“헉, 죄, 죄송해요.”
“괜찮다, 아프지 않으니.”
어김없이 돌아오는 태연한 목소리를 들으며 라일라는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
마음이 흐트러진 라일라는 스텝이 엉켜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일라를 달래길 포기한 아인츠베른은 그냥 제 발등 위에 올라오라고 말했다. 풀 먹인 실처럼 뻣뻣해진 라일라를 발 위에 얹고 춤을 추면서 아인츠베른은 엘리자베스의 옆모습을 흘긋 살폈다.
아인츠베른은 라일라와 두 곡을 함께 추고 비올라와 한 곡을 추면서, 엘리자베스의 파트너가 여섯 번 바뀌는 것을 보았다.
저쪽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두고 신경전이라도 벌이는 걸까.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아름다워서? 아니.
‘그보다는 좀 묘한…….’
아인츠베른은 의례적인 춤을 마친 후, 와인잔을 들고 연회 가장자리에 왔다. 벽에 기댄 채 업무를 마친 사람처럼 잠깐 숨을 돌렸다.
린드벨의 여동생인 라일라 클로에는 그보다 네 살 어린 공녀였다. 데뷔탕트를 치르자마자 사교계의 유명인사로 떠오를 만큼 사랑스러운 아가씨였지만, 아인츠베른에게는 그저 친동생 같은 존재였다.
참관객들은 두 사람을 보며 잘 어울리는 짝이라고 입방아를 찧어댔다. 개중 젊고 아름다운 교황에게 연심을 품은 이들이 멋대로 라일라를 질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아인츠베른은 여동생들과만 두 번 춤을 추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아인츠베른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자, 틈을 보던 귀족들이 하나씩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전하. 일전에 말씀하셨던…….”
“괜찮다면 저와도 잠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차기 황제가 될 둘째 황자, 앞길이 유망한 교황, 혹은 단순히 제국에서 가장 이름 높은 미남자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와 친해지길 원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평소에는 아인츠베른의 심기를 건드릴까 말 한 번 못 걸던 자도 이 자리를 빌려 용기를 냈다. 그래도 눈치를 봐서 질서 없이 둘러싸는 무례를 범하진 않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아서 아인츠베른에겐 버겁게 느껴졌다.
‘차라리 마수 무리나 서류에 짓눌리고 있는 게 낫겠군.’
슬슬 그들을 물리고 싶어질 때쯤, 귀에 들어오는 낭랑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면 다들 나샤로 출전하시는 거예요? 멋져라.”
묘한 말에 고개를 돌리자 어김없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분홍 머리가 언뜻 보였다. 그렇게 무대를 누비더니 언제 물러난 건지, 이번에는 테이블에서 사람들과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두 남자도 눈에 익었다. 반년 후 그와 함께 나샤로 출전할 기사들이었다.
“그렇죠, 성기사니까요.”
“그러고 보니 레이디가 나샤의 접경국인 할스테리어에서 오셨죠. 평소에 많이 무서우셨겠습니다.”
아인츠베른은 다가오는 사람을 물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잔도 새로 채울 겸, 잠깐 소파에 앉아 린드벨이나 기다릴 생각이었다.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가자 인파에 가려 있던 엘리자베스의 수줍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든든한 기사님들을 실제로 보니, 마음이 놓이네요. 얼마나 감사한지.”
“하하하, 레이디를 위해서라도 이 한 몸 불사르고 오겠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귀족 영애의 따뜻한 응원에, 기사가 아닌 이들까지 껄껄 웃으며 흐뭇해했다. 감색 머리의 성기사는 가슴에 주먹까지 대가며 힘차게 맹세했다. 그의 앞에선 늘 성실하고 과묵한 모습만 보여주던 이였는데, 저런 성격이었던가.
그 테이블에 있는 귀족들의 얼굴은 모두 약간씩 붉었다.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으며 하나둘 술에 취해버린 듯했다.
“정말 믿음직하네요. 위대한 테헤라님의 수호 아래에 있으니, 사실 저는 무서운 것도 없죠.”
아인츠베른은 새로운 술을 집어 들었다. 성 에퀴테스의 뛰어난 청각은 소란의 틈바구니에서도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를 예리하게 잡아냈다.
“나샤의 난민들에 비하면요.”
“레이디께선 제 조카와 또래신데도 벌써 성숙한 생각을 가졌군요.”
“그러게요. 가진 것에 감사하는 건 당연하면서도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하하… 아니에요, 전 그냥.”
귀족들의 찬탄에, 엘리자베스는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하루빨리 나샤를 구원해 그 땅에서 고통받는 제국민들이 우리에게 되돌아올 수 있길 바랄 뿐이에요.”
“…….”
왁자지껄 떠들던 귀족들 사이로 갑작스러운 침묵이 흘렀다.
의아하게 고개를 드는 엘리자베스를 두고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빛을 교환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거나, 작게 웃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왜, 왜 그러시죠?”
“아닙니다, 하하. 엘리자베스 양은 아직 순수하시군요.”
“나샤를 구원한다니. 그런 날이 오면 좋긴 하겠네요.”
“다들 그러지 마십쇼. 나이가 어리시니 충분히 그리 생각하실 수 있죠.”
“무슨 뜻인지…… 제가 문제 되는 말을 했나요?”
엘리자베스가 어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귀족들과 성기사들은 호쾌하게 웃었다.
“문제가 된다기보단, 실제 나샤로 출정을 가본 입장에선 실정에 맞지 않는 말이라고나 할까요. 여러모로 실현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위험도도 높고 품도 많이 들고. 제국민들뿐만 아니라, 귀족 사회에도 타격이 클 겁니다.”
“맞아요, 그렇게 되면 레이디 또한 많은 것을 내놔야 할걸요. 지니고 계신 아름다운 장식품들을 포함해서.”
“그런 건 상관없어요.”
또박또박한 목소리에 아인츠베른이 고개를 들었다.
엘리자베스는 한 몸에 비웃음을 받으면서도 똑바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여려 보이던 분홍색 눈동자에 의외의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나샤에는 아직 많은 사람이 남아 있어요.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게 있나요?”
“말이야 쉽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엘리자베스의 말을 철없는 귀족 영애의 이상론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렇게 나샤의 난민들을 전부 받아들여도 문젭니다.”
“맞습니다, 지금 나샤에 남은 건 죄다 나라에서 추방된 범죄자 아니면 마녀의 후손들뿐이니……. 하하, 나샤의 땅을 한 번이라도 밟아본 자라면 제 말에 공감할 겁니다.”
“글쎄, 나는 그렇지 않은데.”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성기사들은 언짢은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언제부터 서 있었을지 모를 주군을 맞닥뜨리곤 화들짝 놀랐다.
아인츠베른 교황은 언제나처럼 수려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했다.
“나샤의 수복은 우리 성전의 제1 목표라 이르지 않았나.”
“……흡.”
“아무래도 신전의 가르침이 부족했나 보군.”
“그, 그게.”
성기사들은 단숨에 술기운이 날아가는 듯했다. 그들은 즉시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성하!”
“술에 취해 잠깐 정신을 놓았나 봅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건 내 쪽이 아니지 않나.”
아인츠베른의 말에 기사들은 곧장 엘리자베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한마디씩 거들던 귀족들도 눈치를 살피다 실언이었다고 변명하며 후다닥 사라져버렸다.
왁자지껄하던 테이블이 순식간에 단둘만 남아버렸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아인츠베른은 머쓱하게 엘리자베스를 돌아봤다.
“제가 객을 다 쫓아버렸군요.”
“전하께서 제 객이 되어주시면 되죠.”
엘리자베스가 빙긋이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엘리자베스 위터, 할스테리어에서 온 남작 영애.
“방금은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이곳에 오면서 교황 성하를 뵐지도 모르겠다고 기대했는데. 이렇게 인사를 나누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치 첫 만남에 나누었던 눈 맞춤이나 속삭임 같은 것은 없었던 것 같은 인사다. 하지만 아인츠베른은 부러 지적하지 않고 답했다.
“……다행이군요. 저도 레이디와 대화를 나누고 싶던 차였습니다.”
“어머.”
엘리자베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술을 가렸다.
“소문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네요. 그렇게 뻣뻣하진 않으신데.”
“…….”
그녀는 레이디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는 아인츠베른의 말이 입에 발린 소리라고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아인츠베른에게 그런 요령은 없었다. 그는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한 말들, 진심입니까?”
성전의 제1 목적은 나샤의 회복이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은 나샤를 배척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아인츠베른 조차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생각을,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귀족은 처음 보았다.
호기심 어린 아인츠베른의 질문에, 엘리자베스는 태연히 답했다.
“당연하죠. 그게 신성연합국의 첫 번째 약속이잖아요? ‘대륙의 모든 인간은 성신의 자녀다.’ <탈환론>에도 나온다고요.”
“<탈환론>을 읽었습니까?”
웬만한 일로는 표정을 바꾸지 않는 아인츠베른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렇게 물꼬를 튼 대화는 한참 동안 이어졌다. ‘탈환론’, ‘나샤 해방론’, ‘제국의 원류’ 어렵고 오래되어 아는 사람들이 없던 책들을 엘리자베스는 모두 알고 있었다. 늘 칼리버 호수처럼 잔잔하던 둘째 황자의 들뜬 모습을, 귀족들은 놀란 눈으로 힐끔거렸다.
둘 사이에 끼고 싶어 주변을 서성이는 참관객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가도, 기가 죽은 채 다시 돌아오기 일쑤였다. 주변인들을 모두 따돌리고서 그들은 둘만의 세계에서 대화에 몰입했다.
“아, 그 책도 물론 알죠. 유명한 저술가 칼 제이커의, 읏.”
“괜찮습니까?”
“아뇨, 음, 그냥 목이 말라서, 콜록.”
“이런, 너무 오래 붙잡아버렸군요.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아, 제가 가도.”
말릴 새도 없이 아인츠베른이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는 엘리자베스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되는데.”
팔짱의 낀 그녀의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음료 트롤리를 몰고 오는 접객원과 아인츠베른의 발 사이로, 불온한 마력이 흑심을 담고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