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est on Top RAW novel - chapter (122)
막내온탑 122화(122/299)
* * *
엔리크의 공인 끝에 나는 이…… 이상한 발언을 하는 천사가 카일루스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일단은.
‘카일루스.’
카일루스: 그래, 내 사랑하는 동생.
카일루스: 네가 나를 부르는 걸 들으니 꿈만 같구나.
카일루스: 우리 막내가 없는 지난날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 같아서…….
카일루스: 나의 단비, 나의 햇살, 나의 무지개.
“…….”
진짜 적응 안 된다.
나는 팔에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슥슥 문질렀다.
엔리크: 우욱……!
엔리크는 닭살을 넘어 속이 울렁거리는가 보다.
솔직히 나도 그냥 한번 쏟아내고 싶었다.
카일루스: 엔리크, 어디서 더럽게 토악질이야?
카일루스: 아르테미아 님의 천사라면 응당 그에 걸맞는 품위와 몸가짐을 갖추거라.
이런 걸 보면 카일루스가 맞는 것 같기도 한데.
카일루스: 내 사랑스러운 동생의 조그마한 귀에 그런 불쾌한 소리를 들려주다니.
엔리크: 이거는 소리가 아니라 활자로 전달되는데.
카일루스: 그럼 내 사랑스러운 동생의 티 없이 맑은 눈망울에 더러운 글자를 비췄구나.
카일루스: 내 영혼, 내 숨결. 괜찮은 거니?
카일루스: 너의 그 연약하고 청명한 눈동자가 다치지 않았을지 걱정이구나.
벅벅벅!
나는 팔을 거칠게 문질렀다.
사람이 머리를 어떻게 다쳤으면 이렇게 변하지?
진짜로 카일루스 맞나?
아직도 의심이 들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게 있다.
허투루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다.
‘나한테 카일루스의 권능이 필요해.’
말하고 나는 아차 싶어서 덧붙였다.
카일루스는 내가 필요로 한다고 해서 자신의 능력을 나눠줄 천사가 아니었다.
‘이건 내 개인의 욕심 때문에 필요한 게 아니고, 아르테미아 님을 위해서야. 아르테미아 님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지금 사경을—.’
카일루스: 그렇게 길게 설명할 필요 따윈 없단다.
카일루스: 이 오라비의 힘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네게 나누어주마.
카일루스: 내 영혼과 심장인 널 위해서라면 내가 무엇인들 못 해주겠니?
나는 가만히 그 대화창을 바라보다가 엔리크를 불렀다.
‘엔리크.’
엔리크: 진짜 맞아.
엔리크: 나도 믿기지 않는데 진짜로 진짜야.
‘……알았어.’
카일루스의 권능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신성력이 필요했다.
본디 내가 가진 신성력은 카일루스와 결이 비슷하기에 더 수월했겠지만…….
지금 나는 조금만 신성력을 무리하게 운용해도 디바인 하트가 조각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나는 뒤를 돌아 어른들을 바라보았다.
“모두 내게 힘을 빌려줘서 고마워요.”
“당연한 일이다.”
“오히려 나야말로 고마워. 이렇게 의지해줘서.”
어른들이 내게 미소 지었다.
무려 천계까지 닿을 정도로 힘을 모았다.
갑자기 훅 빠져나가는 신성력에 이들도 지치지 않았을 리 없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피로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뿌듯하고 벅차고 고무된 얼굴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한 번 더 빌려줘요. 내가 카이저 님을 구할 수 있도록.”
“얼마든지.”
“우리의 성녀님의 뜻대로.”
“사에, 네가 원하는 것을 하려무나. 우리가 너를 받쳐줄 테니.”
대신관의 손이 내 정수리를 꾹 눌렀다.
힘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그래, 무려 천계까지 다녀왔는걸.’
할 수 있다.
나는 반드시 카이저를 살려낼 것이다.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내 가족들이 내게 전해주는 신성력이 느껴졌다.
한 번 <통합>을 마친 후인데도 전혀 밀리지 않는 힘.
그 힘을 탄탄하게 지지대 삼아 나는 내 안을 가다듬었다.
“카일루스.”
소리 내어 읊조린 말은 의지와 심상을 보다 확실하게 더 선명하게 만든다.
실의 기억을 읽는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다.
그것도 카이저의 목숨을.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방법을 동원해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다.
“아르테미아 님의 다섯 번째 사자. 나의 형제, 나의 인도자, 나의 수호자여.”
내 목소리가 깊은 울림을 담고 퍼져나갔다.
우우우웅—!
세계가 낮게 울리며 공명했다.
찬란한 빛이 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며 천사의 고리로 화(化)했다.
“나에게 그대의 힘을. 나의 손으로 그대의 뜻을 이루고, 나의 입술이 그대의 말을 전할지니.”
카일루스: 나 카일루스의 권능이 지상에 있는 나의 숨결, 나의 영혼, 나의 심장을 통해 발현될지니—.
카일루스와의 연결이 깊어지며 그의 힘이 내게로 쏟아져 내렸다.
서늘하고 차갑고 냉랭한 기운.
치유력이라고 하기에는 온기 하나 없이, 너무나 시린 기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침입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한없이 맑은 기운이기도 했다.
내게 익숙한, 낯익은 기운.
나는 그 힘을 거부하지 않고 모조리 받아들였다.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한 힘이었지만—.
“사에.”
내 가족들이 나를 받쳐주었다.
연결이 강해지면서 저절로 카일루스의 모습 일부가 내게 투사되기 시작했다.
내 등 뒤로 커다란 날개가 돋아났다.
새하얀 여섯 장의 날개.
카일루스의 날개였다.
카일루스의 권능이 내게 완벽하게 깃든 것이다.
“카이저 님…….”
나는 조심스럽게 카이저에게 다가갔다.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한 그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제발 일어나요.”
내 입술이 그의 반듯한 이마에 닿았다.
축복의 키스.
카이저의 이마에 카일루스의 축복과 권능이 깃들었다.
“……우리 아빠를 살려줘, 카일루스.”
* * *
카이저는 질척한 어둠을 헤매고 있었다.
진득거리는 죽음이 그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를 않았다.
‘결국 이렇게 됐군.’
카이저는 덤덤하게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계속해서 마물과의 전장을 헤매다 보면 그 피가 발목에 엉겨 붙는 날이 오기 마련이다.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전장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남은 건 죽음뿐이다.
‘이렇게 끝나도 뭐, 상관없지.’
삶에 별 미련은 없었다.
신성력에 재능이 있는 채로 태어나 신전에서 자랐고, 각성했고, 성기사로 두각을 드러냈다.
그저 흘러가는 삶이 그랬을 뿐, 거기에 흔히 말하는 사명감 따위는 없었다.
카이저, 사람들을 구하고 평화를 수호하는 위대한 성기사.
사람들은 그렇게 그를 칭송했지만—.
‘개소리.’
카이저는 그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아니, 무의미한 것을 넘어 사실은 이제 지겨웠다.
카이저는 자신에게 엉겨 붙는 죽음에 반항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발이 아래로 빨려 들어갔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별생각 없는 걸 보면 마족의 농간인가 보군.’
삶의 몇 부분을 단절시켜 놓은 게 분명했다.
그가 기억해내서 죽음에 저항하지 않도록.
그걸 알면서도 카이저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어차피 그에게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정도로 중요하고 소중한 건 하나도 없었다.
‘어라?’
문득 카이저는 자신이 손에 검 대신 다른 것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대 잃어버릴 수 없다는 듯이 조그맣고 단단한 무언가를 꽉 쥐고 있었다.
‘……뭐지?’
손을 펴보자 이런 진득한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 나타났다.
꾸며진 모양을 보니 크레푼디아였다.
신년이 되면 수련 사제 아이들이 존경하는 어른에게 만들어 주는 호부.
당연히 카이저는 이런 걸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이걸 소중하다는 듯이 쥐고 있지?’
푸르게 빛나는 보석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 같았다.
그런가 하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바다가 일렁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 빛,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한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카이저는 무심결에 걸음을 옮기려다가 멈칫했다.
다리에 무언가가 매달려있었다.
차갑고 질척거리는 죽음과는 다른, 아주 따뜻하고 말랑거리는 온기가.
천천히, 카이저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다리를 꼭 붙든 채 동그랗게 등을 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짙은 어둠조차도 아이의 찬란한 금발을 좀 먹지 못했다.
“너…….”
이 아이는 누구지?
상관없는 아이니 떼어 놔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카이저는 그러지 못했다.
그때,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카이저는 크레푼디아의 빛이 아이의 눈동자를 꼭 닮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카자밈, 따에 기차나?”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말.
하지만 기억에 없는 아이였다.
“……여기 있지 말고 돌아가거라.”
아이는 눈을 깜빡이더니 더 다리에 꽈악 달라붙었다.
“여기 있으면 죽는다. 여기 있지 말고 돌아가래도.”
“따에 요기 이써요!”
“놓으라니까!”
“카자밈이랑 이쓰 꺼야!”
카이저는 멈칫했다.
분명 처음 보는 아이였다.
하지만 카이저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것도 이 아이와.
카이저는 제 기억 속에 있는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러니까 왜.”
“따에 카자밈 조으니까!”
아이가 해맑게 말했다.
기억에 있는 얼굴, 기억에 있는 목소리, 기억에 있는 대화.
“카자밈……. 따에 버리먼 앙대……. 차칸 아이 할 테니까…….”
“…….”
“따에가 잔못한 고 다 고칠게요.”
“…….”
“다 고치 쑤 이써요. 따에 차칸 어린이하께요.”
절대 잊을 수 없는, 잊지 못하는—.
“따에 카자밈 조아.”
“……사엘리카.”
그래, 이 아이가 있었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이유.
“카자밈, 따에 아빠가 되어두세요. 차칸 아이 하께요.”
나의 딸.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갈 생각을 했지?
카이저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맑디맑은 신성력을 지닌 크레푼디아가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약속했는데.’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아빠 없는 아이 만들지 말겠다고.
“……네가 이번에도 나를 구원했구나.”
하마터면 이대로 마족의 계략에 넘어가 순순히 죽어줄 뻔했다.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죽음 앞에서도 무감했던 카이저의 눈동자에 의지가 깃들기 시작했다.
“란델 그 녀석에게 내 딸을 맡겨도 안심할 수 없고.”
무엇보다—
“처음으로, 으흑, 내게 처음 생긴 아빠인데, 흡,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요…….”
내가 없다고 그 애가 울었다.
곁에 있어 달라고, 아빠 없으면 싫다고.
‘달래주러 가야 해.’
지금도 울고 있을 거다.
카이저는 질척거리는 죽음을 떼어냈다.
떼어내도 떼어내도 다시 죽음이 다시 달라붙어 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삶과 죽음의 경계의 공간은 일그러져 시간조차 고여 맴돌기만 한다.
억겁 같은 시간 속.
어느 순간 자신을 붙들고 있던 사엘리카의 환영도 사라졌다.
죽음의 기운이 숨을 막고 심장을 녹이는 가운데 카이저는 홀로 묵묵히 싸웠다.
영혼이 베이고, 꿰뚫려도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앞으로 나아갔다.
돌아가야 하니까.
돌아가서 그 아이에게 말해줘야 한다.
나는 너를 버리지 않았다고.
내 딸을 위해서 죽음도 이겨냈다고.
평생 너와 함께 있을 거라고.
그러니까—.
“울지 마, 내 딸.”
말라붙어 잘 움직이지도 않는 입술을 움직여 카이저가 딸을 달랬다.
손발에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걸음을 옮기는 법조차 잊었다.
그럼에도 카이저는 앞으로 나아갔다.
인간이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
오로지 강렬한 의지만으로.
“……빠……”
숨결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였다.
착각이라고 생각해도 아무렇지 않은.
그러나 카이저는 대번에 그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착각 따위가 아니다.
착각일 수가 없다.
아무리 작은 목소리인들 어떻게 확신하지 않을 수 있을까.
딸의 목소리인데.
“울지 마.”
카이저가 속삭였다.
더 크게 말해주고 싶은데 목소리가 다 갈라져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빠 여기 있어. 그러니까 울지 마.”
그 순간이었다.
“아빠……. 아빠, 아빠아—!!”
사엘리카의 목소리가 그 어느때보다 분명하고 선명하게 들렸다.
카이저가 그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든 순간, 강렬한 기운이 해일처럼 그를 뒤덮었다.
죽음과도 같이 시리고 무자비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카이저는 그 안에서 딸의 온기를 느꼈다.
아주아주 사랑스럽고, 말랑하고, 그러면서도 한없이 강인한—.
카이저는 꿰뚫리고 찢어지고 베이고 녹아내렸던 영혼이 치유되는 것을 느꼈다.
오래 전, 마물에게 오염당한 자신을 그 아이가 정화해주었던 것처럼.
아득하고 그리운 기억에 카이저는 미소 지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너를 지키라고 하지만.
‘언제나 네가 나를 지켜주는구나.’
그 누구보다도 강한 내 딸.
나는 네 곁으로 언제나 돌아갈 거야.
그 누구보다 강한, 억겁의 시간 동안 삶과 죽음의 무게를 견뎌낸 영혼의 의지였다.
카이저는 딸이 이끌어주는 대로 죽음의 경계를 넘었다.
* * *
카이저의 방안.
굳게 닫힌 채 열릴 줄 모르던 카이저의 눈이 움찔했다.
“……!”
단번에 눈을 뜬 카이저의 눈동자에 곧장 딸의 얼굴이 비쳤다.
울음으로 엉망이 된 얼굴이었다.
그가 미소 지었다.
“……내 딸이 천사처럼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진짜 천사일 줄이야.”
권능의 사용으로 날개는 물론 후광까지 번쩍이는 사엘리카를 보고 카이저가 말했다.
사엘리카는 웃으려고 했지만 자꾸 얼굴이 일그러져서 실패했다.
“흐읍, 흑…….”
“울지 말래도.”
“흐어어어어엉, 아빠아—!!”
사엘리카가 와락 너른 품에 안겨들었다.
아빠의 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