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est on Top RAW novel - chapter (292)
막내온탑-292화(292/299)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슈리를 바라보았다.
그가 웃었다.
“사엘리카.”
묘한 울림이 담긴 부름이었다.
“내 천사님.”
“……!”
이건 전생의 슈리가 둘만 있을 때 나를 부르던 말이다.
그야 지금도 나는 천사라 할 수 있다.
용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슈리…….”
“이제 널 놓아주지 않을 거야.”
“내가 널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
머나먼 과거에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슈리가 내 뺨을 움켜쥐었다.
“네가 떠나려고 해도, 절대.”
“이제 떠나라.”
오묘한 빛의 눈동자가 나를 오롯이 담았다.
언젠가 그랬듯이.
그때, 내가 뭐라고 말했더라?
“왜?”
“절박해서.”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울컥, 속에서부터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코끝이 찡하다.
하지만 결국 나오는 것은 웃음이었다.
“너는…… 나를 절대 외롭게 하지 않는구나.”
혼자만 기억하는 게 쓸쓸하다고 생각했던 게 바로 조금 전인데.
어떻게 슈리는 또다시 나를 이렇게 환하게 밝혀주는 걸까.
“나는 항상 너를 외롭게 만들었는데.”
“……넌 나를 외롭게 한 적 없어. 그때도, 지금도.”
“…….”
“너를 만나서, 너를 알아서, 너를 기억할 수 있어서.”
“…….”
“나는 언제나 너랑 함께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낮고 차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감겼다.
내게서는 자신에 대한 기억을 송두리째 지웠으면서.
슈리는 그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중하다고 말한다.
나는 말랑말랑해진 가슴을 느끼며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그래서 결혼도 안 하고 살았던 거야?”
슈리가 멈칫했다.
“내가 듣기로는 대륙 곳곳의 엄청난 미인들과 재인들이 몰려들었다던데. 무려 재앙을 잠재우고 제국을 건국하신 황제 폐하시니.”
“……없었어.”
“뭐?”
“너보다 예쁜 애 없었다고.”
“…….”
툭 던진 말에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슈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뺨을 타고 검은 머리카락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누구 때문에 눈만 높아진 바람에 평생 결혼하라는 잔소리만 들었지. 그러니까—.”
커다란 손이 내 왼손을 움켜쥐었다.
뜨거운 입술에 손을 꾹 눌렀다.
정확히 약지를.
“이번엔 책임져야지?”
슈리의 눈동자가 집어삼킬 듯 나를 담았다.
* * *
잠시 후.
침실 문이 열렸다.
그 앞에서 왔다 갔다 거리며 안절부절못하던 사내들이 일시에 고개를 바짝 들었다.
미어캣 같은 모습이었다.
……덩치는 우락부락했지만.
“성녀님…….”
사엘리카를 보고 다가가려던 사내들이 움찔했다.
사엘리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붉고 눈빛은 몽롱했다.
“성녀님?”
“……아예 말이 안 들리시나 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내들이 두려운 눈으로 꾹 닫힌 침실 문을 바라보았다.
궁금한데 또 알고 싶지 않은 이 기분은 뭘까.
“……뭐든 주인님이 미인계를 쓰면 그 파괴력이 엄청나긴 하지.”
“그래, 면역이 쌓인 우리조차 가끔씩 깜짝 놀라서 심부전이 올 정도니까.”
“……하지만 성녀님의 면역력도 만만찮을 텐데? 온갖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는데.”
아르테미아 신관들과 사제들은 미모로 이름이 높았다.
오죽하면 안구 정화하러 예배에 참석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
거기에 아직도 사엘리카의 주변을 맴도는 왕자들은 어떤가.
심지어 엘프들과 수인들 그리고 용인족들까지.
“……웬만해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꼬신 거지?”
결국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이는 법.
슬쩍 침실 문을 연 사내들은 내상을 입고 쓰러졌다.
“무, 물에 젖기까지 하다니!”
“심지어 그냥 물에 젖은 게 아니야. 꽃까지 흩뿌렸어……!”
“진짜 혼신의 힘을 다해 꼬시는구나!”
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 이렇게까지 내숭을 떨 줄이야!
* * *
황태자궁에서 나온 사엘리카는 슬슬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드넓게 이어진 황궁 정원을 몇 개나 넘나들며 걷고 있었다.
‘아, 슈리한테 줄 거 잔뜩 챙겨왔는데 깜빡했네.’
뒤늦게 천계에서 바리바리 싸 들고 온 보물들이 생각났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기엔 왠지 민망했다.
사엘리카는 제 왼손을 내려다보다가 멈칫했다.
“나와.”
정처 없이 걸은 탓에 사엘리카가 있는 곳은 황궁의 외궁 중에서도 인적 드문 곳이었다.
당연히 그녀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돌아오는 대답도 없었다.
하지만 사엘리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입을 열었다.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좋은 말 할 때 나와라.”
그러자 부스럭거리며 덤불이 움직였다.
“역시 달링은 언제 어디서나 나를 알아보나 봐. 이게 바로 천생연분인가?”
그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 아닌 베헤모른이었다.
‘에릴라우스 제단 덕에 내궁에는 들어오지 못했나 보네.’
사엘리카는 주먹을 꽉 쥐었다.
“됐고. 일단 좀 맞자.”
웅혼한 황금빛 서광이 주먹에 어렸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었다.
베헤모른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 재앙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니까?”
“그래서?”
“다 파르마나스와 그 끄나풀들이 꾸민 일이야. 알잖아. 난 달링을 사랑하기도 바빠.”
사엘리카의 눈빛이 더 싸늘해졌다.
“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이겠지. 그리고 파르마나스 신전에 네가 힘을 빌려준 건 사실이잖아?”
“달링을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서 그랬던 거지. 무엇보다—.”
베헤모른이 사엘리카에게로 바짝 다가왔다.
“—내가 그런다고 해서 이렇게 화낸 적은 없잖아. 우리 사이에, 한두 번도 아닌데.”
그 말대로였다.
미친 사이코 변태 스토커 짓을 오죽 많이 했으면 미사라고 부르겠는가.
“착각하고 있는데.”
“……?”
“난 그거 때문에 빡친 게 아니야.”
사엘리카가 주먹을 스윽 들어 올렸다.
“네가 슈리한테 한 짓 때문에 개빡친 거거든.”
빠악!
청명한 하늘 아래 변태 놈이 타작 당하는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 * *
“충격이야.”
베헤모른이 퉁퉁 부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한테 이렇게까지 화를 낸 이유가…….”
그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사엘리카를 째려봤다.
바람난 남편을 보는 시선이었다.
“다른 남자 때문이라니.”
“…….”
미쳤나.
사엘리카는 저도 모르게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원래 미친놈이었지.’
“천 년 넘게 이런 적은 없었잖아. 그딴 인간 놈이 어디가 좋다고.”
진짜 속상한 듯한 모습에 사엘리카는 푹 한숨을 쉬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베헤모른하고는 천 년 넘게 쌓아온 세월이 있었다.
“……슈리가 좀 싸가지 없고, 재수 없는 데다가 제멋대로긴 하지.”
이번 생에서 처음 카이슈리트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사엘리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베헤모른은 진심으로 눈꼴 시었다.
저런 말을 하면서 저런 미소를 짓다니.
반칙 아닌가.
“하지만 슈리는 누구보다 다정해.”
“……뭐?”
베헤모른은 어이없는 눈으로 사엘리카를 바라보았다.
그가 인계에 오래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하나는 확실히 알았다.
카이슈리트란 인간은 다정과는 억만년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거슬리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다 죽여버릴 놈이었다.
“넌 망설임 없이 내 결계를 깼잖아. 하지만 슈리는 이미 파손된 결계조차 깨지 않았어.”
사엘리카는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아르테미아 신관들이 도착해서 결계를 해제해주고 나서야 나왔겠지.
“혹시라도 내가 아플까 봐.”
“……그게 왜?”
베헤모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은 내 존재를 상대방에게 각인시키는 최적의 방법이야. 그보다 더 짜릿한 게 어디 있다고.”
“…….”
“반대도 마찬가지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참 짜릿했어. 아직까지도 내 몸에 달링이 남겨준 사랑이 가득해.”
베헤모른이 윙크했다.
“물론 나에게 이런 기쁨을 줄 수 있는 건 달링뿐이야.”
……진짜 그냥 죽여버릴까.
지금은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사엘리카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긴, 그놈도 나처럼 달링으로 인한 고통을 즐기긴 했네.”
“……장난해? 슈리는 너 같은 변태가 아니거든?!”
“달링을 위해 내 저주에 걸렸잖아.”
“…….”
잠시 침묵하던 사엘리카가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보통은 그게 고통이겠지.”
저주가 아니었다면 황제의 적장자로서, 제국의 황태자로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얼마나 눈부신 삶을 살았을까.
손가락질 당하며 황궁 밖으로 나돌 이유도 없었다.
“근데 슈리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수천, 수만 명의 사람한테 둘러싸여서 칭송 받아봤자 아무 의미도 없어.”
“…….”
“난 너 하나면 돼.”
“슈리는 그걸 고통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
“변태인가?”
사엘리카가 베헤모른을 노려봤다.
변태 따위가 슈리를 변태라고 하다니!
“슈리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공을 챙기려고 한 적 없어. 슈리가 없었다면 나는 그날 에릴라우스 제단에서 힘을 각성하지도 못했을 거야.”
그렇다면 형제들이 이 땅에 내려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아멜리아가 파르마나스의 힘을 완전히 손에 넣어서 진짜 재앙이 시작되었겠지.
카이슈리트가 제단에 준비되었던 진을 조작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어그러졌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일을 하면서 단 한 번도 내색한 적이 없어.”
“…….”
“예전에도 그래. 날 구해줬으면서도 한 번도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지 않았어.”
어느 순간 곁에 나타났고, 어느 순간 힘을 보태줬다.
“너도 알잖아. 난 생색내야 하거든. ‘봤냐? 우리 아르테미아 님의 힘을!’ 하면서 난리 쳐야 해.”
“…….”
“아까 이 말을 했더니 슈리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회귀 전에 너는 이름도, 존재조차 빼앗긴 채 살아왔잖아.”
“나조차도 신경 쓰지 않았던 걸 슈리는 신경 쓰고 있었어.”
“아멜리아 따위의 그늘에 가려서 사엘리카도, 레이아르샤도 모두 잃어버린 채 살았지.”
“…….”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 이름만 있으면 돼.”
그게 바로 카이슈리트가 세상을 구했음에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 이유였다.
“그러면 너는……?”
“난 이미 한 번 내 마음대로 굴었잖아.”
“……?”
“내 욕심에 네 이름을 나만 가졌었으니까.”
전생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사엘리카의 진짜 이름을 아는 건 그가 유일했으니.
“난 슈리가 좋아.”
송두리째 빼앗긴 삶을 살아놓고서 그걸 기쁨이라고 하는 미련한 남자.
“…….”
가만히 사엘리카의 말을 듣던 베헤모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결국 뭐야, 남친 자랑이냐?’
진짜 어이가 없었다.
이게 다른 놈도 아니고 자신에게 할 소리인가?
더 기가 막힌 건 따로 있었다.
“베헤모른, 너에게도 그런 존재가 나타날 거야.”
사엘리카가 그렇게 말한 것이다.
심지어 진심을 가득 담아서!
쾅!
베헤모른이 사엘리카를 거칠게 벽으로 몰아붙였다.
“다른 말은 그냥 넘겨줄 수 있어. 그런데, 뭐?”
“베헤모른…….”
“나한테도 그런 존재가 나타날 거라고? 널 두고?”
베헤모른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타올랐다.
“그 말은 하지 말았어야지.”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사엘리카의 뺨을 쥐었다.
언제나 능글맞았던 베헤모른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넌 내가 널…….”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어린 시절부터 사엘리카를 보면 즐거웠다.
천 년이 넘도록 재밌었다.
어떻게 해도, 무슨 짓을 해도.
“널, 무슨 장난감으로 생각하는 줄 아는 거냐.”
사납게 일어났던 기세와 달리 베헤모른의 목소리는 갈수록 힘이 빠졌다.
“슈리가 좋아.”
그렇게 말하며 웃던 사엘리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과 전혀 다른 표정.
“젠장!”
베헤모른은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홀로 남은 사엘리카는 눈을 깜빡였다.
베헤모른이 저렇게 구는 건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처음 본다.
‘와, 진짜 삐졌네.’
사엘리카는 어깨를 으쓱했다.
시간이 꽤 지체됐다.
천계에서 돌아오자마자 아무 설명 없이 나왔으니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빨리 돌아가자.’
사엘리카가 벽에 부딪친 어깨를 툭툭 치며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
괴생명체와 눈이 마주쳤다.
* * *
자세히 보니 괴생명체는 가족들이었다.
“아, 아빠?!”
아르딘, 카이저, 란델 아빠뿐만이 아니었다.
삼촌과 오빠들 그리고 대신관을 비롯한 장로들과 사제들도 있었다.
다들 묘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다들 왜 그래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묻는 사엘리카를 보고 가족들은 점점 다시 원래의 형태를 되찾기 시작했다.
“……사실이냐?”
“뭐가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딸아이를 보며 노이슈라헬 대공은 차마 다시 묻지 못했다.
“난 슈리가 좋아.”
‘커헉!’
그 말을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맹독에 중독된 것처럼 애간장이 녹아내렸다.
하물며 카이슈리트는 결혼 적령기!
황태자비의 자리가 비어 있는 것에 대해 이미 여러 말이 나오고 있었다.
아무 말 못하는 노이슈라헬 대공을 보고 카이저가 나섰다.
그는 자신의 딸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아까 마왕 놈한테 했던 말은 그냥 마왕 놈을 차기 위한 속임수다.
아무튼 그렇다.
그게 확실하다.
“사에.”
“네.”
“설마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 놈팡…… 크흠, 황태자를 만나러 간 거냐?”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해줘!
그러나 사엘리카의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딸아이의 흰 뺨이 발그레 수줍게 물들었다.
‘이 날강독슈리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