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est on Top RAW novel - chapter (294)
막내온탑-294화(294/299)
사엘리카는 어이없는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제는 진지했다.
“난 처음부터 아가를 내 며늘아가로 찜꽁했던 거지, 그놈의 짝으로 점찍었던 게 아니다.”
“…….”
“그놈이 내 아가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면 피눈물을 뽑게 만들 것이야.”
“…….”
방금까지 길게 말했던 건 대체 뭐지.
황당했지만, 어떤 의미에선 참으로 황제다웠다.
툭툭.
자신만 믿으라는 듯 잡은 손을 두들긴 황제가 다시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이제 그림을 그려도 될 것 같구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홀가분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주 많은 것이 함축된 말이었다.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반대할 말.
사엘리카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 좋은 붓을 선물해드리지요.”
황제는 빙그레 웃었다.
붓을 받으면 가장 먼저 그리고 싶은 게 생겼다.
* * *
온 제국이 떠들썩했다.
아니, 제국 너머의 다른 나라들까지 난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새 황제가 즉위한다고?!”
황제가 선위를 선언한 것이다.
“황태자는 아직 너무 어리지 않나?”
“현 황제도 정정한데 어째서?”
“설마 무슨 병환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어쩌면 지난 재앙 때 저주에—.”
온갖 소문들이 들끓었다.
이제 약관을 겨우 넘긴 황태자에게 갑작스럽게 선위를 선언하는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대륙의 과반을 차지하고 있는 제국은 그 영향력도 막강했다.
새 황제의 즉위는 제국 내부뿐만 아니라 온 국제 정세를 요동치게 하는 대사건이었다.
그런데 그런 큰일을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선포하다니!
“폐하, 선위라니요!”
가장 당황한 건 바로 제국의 귀족들과 관료들이었다.
“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씀을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황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까라면 까.”
“…….”
귀족들은 멈칫했다.
황제가 저렇게 대놓고 말하다니.
‘이건 진심이다!’
귀족들과 관료들은 생각이 많아졌다.
특히 황제와 가까운 상석에 앉아 있는 자들은 더 그랬다.
새 황제가 즉위하면 필연적으로 조직이 개편되고 권력이 이동한다.
현재 권력의 중심에 서 있는 자들로서는 달가울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솔직히 때가 되면 황태자를 폐위시킬 줄 알았는데.’
‘그리젤다 황녀를 차기 황제 삼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미리미리 카이슈리트와 연을 만들어놓지 못했다.
오히려 척을 졌으면 졌지.
다 카이슈리트가 허울뿐인 황태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황궁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고는 생각했지만.’
귀족들은 눈빛을 주고 받았다.
경륜이 있는 만큼 무조건 반대보단 다른 쪽을 공략하기로 했다.
“하오나 폐하, 선위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아직 폐하께서 이리 정정하신 데다, 황태자 전하의 연치가 어리지 않습니까.”
“예, 선위를 하시더라도 좀 더 시일을 두고 하시지요.”
“이르다?”
황제가 고개를 기울였다.
“카이슈리트가 황태자에 책봉된 지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나보다도 더 오랜 기간을 황태자로 지냈어.”
“그야 워낙 어렸을 때부터 황태자로 책봉되셨으니…….”
“마칸도르 공작, 그간 황태자가 처리한 것들을 말해보아라.”
서류 귀퉁이에 낙서를 하고 있던 마칸도르 공작이 바로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수년 전부터 제국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물을 처단하며 제국을 안정시키셨습니다.”
마칸도르 공작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황제는 그 말을 들으며 무심히 생각했다.
‘저 일은 사엘리카가 변장한 모습을 찾아 돌아다니는 김에 거슬리는 것들을 청소한 거라고 했나?’
“또한 일찌감치 아르테미아 신전을 도와 사특한 파르마나스를 견제하였고…….”
‘이건 사엘리카를 꼬시느라 그랬던 거고.’
“또, 갑작스럽게 나타난 마왕을 막아—.”
‘마왕이 사엘리카에게 집적거렸다고 했지.’
“더 이상 제국에 재앙이 없도록 지금은 사교 잔당들을 추적해 정리하고 계십니다.”
‘파르마나스 잔당들이 사엘리카에게 해코지할까 봐 먼저 족쳤군.’
고개를 끄덕이던 황제가 멈칫했다.
이렇게 정리하니 뭔가 이상했다.
‘……그냥 사엘리카한테 미친놈 같은데?!’
제국 안정에는 사실 아무런 관심도 없는 거 아냐?
그냥 사엘리카한테만 돌아있는데?
‘이, 이 사친놈!’
인생이 전부 사엘리카 중심으로만 이뤄져 있다.
이런 놈에게 진짜로 황위를 물려줘도 되나 걱정이 되었으나.
‘괜찮겠지. 우리 아가가 똑 부러지고 현명하고 영리하고 지혜롭고 총명하고 힘도 세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황제의 얼굴이 헤벌쭉해졌다.
귀족들은 좀 소름 돋는다는 얼굴로 그런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들의 공적을 들으니 기분이 좋으신 건가?’
‘언제부터 그렇게 아들을 아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황제가 팔불출끼를 보이니 황당했다.
“자, 들었지? 즉위하기도 전에 이렇게 제국을 구한 황제가 또 있나?”
“건국하신 초대 황제 폐하를 제외하곤 없지요.”
마칸도르 공작이 황제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귀족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물론 황태자 전하께서는 대단하십니다. 다만, 일신의 힘만으로 제국을 다스릴 수 없는 법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송구하나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나치게…… 그, 카리스마가 넘치지 않습니까.”
한마디로 그거였다.
너무 무섭다!
그러나 일리 있는 말이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군림할 수 없다.
카이슈리트는 그냥 무서운 게 아니라 혐오감을 불러일으켰으니까.
“흠, 귀족들이 이리도 널 반대하는구나. 난 할 만큼 했으니 이제는 네가 해라.”
황제의 말과 동시에 안쪽 문이 열렸다.
“이렇게 떠넘기시는 겁니까. 저는 당장 선위 받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만.”
“……!”
선위를 반대하던 귀족들은 혼비백산했다.
설마 방금 그 말을 황태자가 듣고 있었을 줄이야!
‘잘못하면 온몸의 구멍에서 피를 토하다 죽을지도…….’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조아리던 귀족들.
혐오감에 얼굴을 희게 굳힌 채 얼굴을 돌렸던 귀족들.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던 귀족들이 흠칫했다.
‘……?!’
‘뭐, 뭐지?!’
그들의 시선이 홀린 듯 카이슈리트에게 고정되었다.
카이슈리트는 어렸을 때부터 불길하고 괴기스러웠다.
마주 하는 것만으로도 본능적으로 혐오와 공포 그리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그 끔찍한 기운이 덜해지긴 했다.
그러나 사라진 느낌은 아니었다.
안으로 갈무리되어서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더 불쾌했다.
마치 사람 아닌 것이 사람 탈을 쓰고 완벽하게 사람 행세를 하는 것 같은 위화감이 들어서.
카이슈리트를 가까이서 볼 기회가 거의 없는 대중들은 그 점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대중들이 카이슈리트를 향해 환호할 때마다 더 거북했다.
‘그랬는데 지금은…….’
“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멍하니 카이슈리트를 바라보던 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이토록 진심에서 우러나와 카이슈리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저, 정말 황태자 전하 맞으신가?’
‘이런 분이셨다고……?’
귀족들은 카이슈리트를 힐끔거렸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압도적인 아우라가 카이슈리트에게서 흘러넘쳤다.
인간을 뛰어넘은 듯한, 신성하면서도 초월적인 존재를 목도한 느낌.
가슴 속에서부터 절로 경외심이 우러나왔다.
카이슈리트가 가진 신격 때문이었다.
사엘리카가 저주를 풀면서, 품고 있던 카이슈리트의 신격 역시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신격에 담긴 전생의 기억까지도.
신화의 주인으로서의 기억은 신격과 함께 카이슈리트의 영혼에 깊이를 더했다.
거기에 사람들의 정신을 흐리던 저주까지 사라졌으니 귀족들이 이렇게 반응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인간이 신을 마주하는 순간 들 수밖에 없는 온갖 감정.
그 감정을 오롯이 느끼며 순식간에 카이슈리트에게 감화되었다.
“이, 이런 분을 그간 알아보지도 못하고 감히 불경한 생각만 품었다니…….”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저희에게 알리지도 않고 홀로 제국을 위해 고군분투하셨지요.”
마칸도르 공작이 브리핑했던 일들을 떠올린 귀족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건 그냥 저놈이 사친놈이라서 그랬던 건데.’
딱히 제국을 위했던 것도 아니었다.
진실을 아는 황제는 좀 어이없는 눈으로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나름 제국을 이끄는 자들인데 너무 귀가 얇은 거 아냐?’
아니, 귀가 아니라 보이는 것에 약한 건가.
아니면 감이 좋아서 저주의 기운도, 신격의 기운도 잘 느껴서 문제일 수도.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고민하던 황제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저를 벌해주십시오! 폐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간 어리석은 짓만 저질렀습니다.”
“부디 못난 저희를 폐하께서 바르게 이끌어주십시오……!”
대신들은 아예 카이슈리트의 앞에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카이슈리트의 한마디에 여태까지 저지른 비리를 알아서 고해바칠 것 같았다.
‘……근데 어째 나한테보다 더 충성하는 거 같은데?’
솔직히 황제로서는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간 함께해온 신하들인데!
‘그보다 방금 폐하라고 부르지 않았어?’
아무리 선위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자신이 황제 폐하인데.
조금 못마땅한 얼굴로 대신들을 노려보는 황제에게 시종이 속삭였다.
“좋으시겠습니다, 폐하.”
“……뭐가 좋아. 저 배신자 놈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고관대작들을 단번에 압도하는 카이슈리트라면 황제로서 잘 해낼 것이다.
무엇보다—.
‘저놈은 모든 것보다 제국을 우선시하지 않으니까.’
사친놈이라서 오히려 더 황제에 걸맞을 수 있다.
사엘리카의 말이 맞다.
‘너는 나 같이 살진 않겠구나.’
물론, 모든 귀족들이 무릎 꿇은 가운데 탐탁지 않은 눈으로 카이슈리트를 노려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노이슈라헬 대공과 에켈란 제독 그리고 그 아들들이었다.
‘……처가에 잡혀 살 거 같지만.’
힘내라, 짜식!
* * *
수많은 인파들이 황궁 앞에 몰렸다.
황궁 앞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의 광장에 대형 크리스탈 전광판이 설치되고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다.
“세상에, 내가 대관식을 직접 볼 줄이야……!”
“하아, 카이슈리트 전하께서 폐하가 되시다니. 이 제국의 미래는 밝다!”
“새 황제 폐하의 얼굴만큼이나 밝지.”
대관식을 보기 위해 몰린 사람들이 즐거운 얼굴로 떠들었다.
새 황제의 즉위.
재앙이 사라지고 새 시대가 열리는 분기점으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게 또 있을까.
“……다 좋은데 왜 내가 여기까지 참석한 거지?”
단탈리온 왕국의 왕세자, 류비크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뮤아트의 세 왕자들과 데카렌 왕세자가 말을 받았다.
“어쩔 수 없지. 제국 황제의 대관식인데 참석 안 할 수도 없지 않나.”
“하지만 그 심정은 이해 가. 사절단이면 충분한데 왜 내가 직접…….”
“그렇다고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제국에 머무는 중인데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사실 정치 외교적으로는 이보다 좋을 순 없는 상황이었다.
카이슈리트는 앞으로 통치할 날이 많은, 강력한 황권을 지닌 젊은 황제였다.
즉위도 전에 벌써 뻣뻣한 고관대작들을 다 굴복(?)시켰다고 한다.
그런 황제의 대관식에 직접 참석했다는 것은 앞으로 제국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또한 각자의 나라에서 입지를 다지는 데에도 도움이 될 터.
하지만 문제는—
“내가 왜 저놈에게 좋은 일을 축하해줘야 하냐고.”
“음! 역시 하루라도 빨리 약탈해야—.”
“어쨌든 최후의 승자는 우리일 거야. 남편은 여럿일 수록 좋다는 진실을 성녀님께서도 깨달으실 테니까.”
—카이슈리트가 연적이라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을 찝찝하게 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왜 이렇게 좋은 자리를 배정해줬지?”
카이슈리트는 자신들을 진심으로 싫어했다.
그런데 이렇게 귀빈석을 배정해주다니 수상했다.
구석에 처박아 놓을 줄 알았는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류비크는 좀 더 고민해보려고 했지만 그 생각은 이어지지 못했다.
사엘리카가 등장한 것이다.
“……!”
대성녀의 예복을 입은 사엘리카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살풋 미소 지은 사엘리카가 카이슈리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었다.
축복의 말이 그녀의 입술에서 나왔다.
그림 같이 아름다운 광경에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투덜거리던 왕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순간 만큼은 좋은 자리를 배정해준 카이슈리트에게 감사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
카이슈리트가 무릎을 꿇는 것 아닌가.
“뭐, 뭐야?”
“왜 무릎을…….”
카이슈리트는 이제 황제였다.
황제는 그 누구에게도 무릎 꿇거나 고개 숙이지 않는다.
그러나 카이슈리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사엘리카에게라면 그의 무릎은 한없이 가볍다는 듯, 아무 망설임도 없이.
“사엘리카.”
나직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넓은 창을 타고 들어온 햇살이 그의 얼굴을 눈부시게 물들였다.
“저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
“……!!”
“……?!”
대관식 홀에 있는 모두가 기함했다.
아니, 대체 누가 황제의 관을 쓰면서 청혼을 해?!
왕자들은 뒷목을 잡았다.
설마 이러려고 잘 보이는 좋은 자리 배정해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