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est on Top RAW novel - chapter (296)
막내온탑-296화(296/299)
하지만 이 상황을 타계할 방법 따윈 없었다.
나중에 결혼하는 게 좋겠다고 먼저 말한 건 아빠들이었다.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슈리 좋아’가 ‘아빠 미워’가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그것만은 절대 안 돼!’
상상만으로도 심각한 내상을 입은 아빠들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런 그들을 향해 카이슈리트가 사르르 웃으며 인사를 했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대체 누가 허락했다고!”
“이 발칙한!”
“이딴 도둑놈에게 내 딸을 내줄 순 없어!”
버럭 외치는 아빠들을 향해 카이슈리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장인어른의 자리에는 누가 앉아야 합니까?”
“……?!”
“……!”
“……!!”
합심해서 카이슈리트를 비난하던 아빠들이 멈칫했다.
이것이 카이슈리트의 간사한 농간질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계략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물러날 수 없는 때가 있다.
절대로 양보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것이 있다!
“나야말로 내 딸의 아빠다!”
비장하게 외치는 아빠들을 사엘리카는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니, 뭘 저렇게 비장하게.’
기세만 보면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에 나가는 것 같았다.
네 남자의 사이에서 흐르는 긴장감을 읽은 장로들이 서둘러 말렸다.
“란델, 카이저! 지금 그럴 때가 아니네!”
“그래, 심정은 이해하지만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따로 있어!”
“맞습니다, 아버지. 우선 저 요망한 여우 놈부터 잡죠.”
“이번만큼은 형님 말이 맞아.”
데미안과 미카엘 그리고 아르테미아의 사제들까지 가세해서 네 남자를 말렸다.
그때였다.
카이슈리트의 혀가 뱀처럼 간교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가족석에는 누구를 앉혀야 합니까?”
“……!”
“……!!”
우뚝.
말리던 사람들 모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폭탄이 던져졌다.
“당연히 우리가 앉아야지!”
“그으럼! 막내와 어렸을 때부터 가족처럼 함께 자란 건 우리야!”
“가족처럼? 우린 그냥 가족이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는 진리조차 모르는 건가?”
아주 난장판도 이런 난장판이 없었다.
사엘리카는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니, 아까까지만 해도 그럴 때가 아니라며?”
“사람은 알면서도 스스로 함정에 걸어 들어가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설령 그 대가로 목숨을 잃더라도!”
“…….”
사제들 중 가장 귀족적이고 품위 있는 에드먼드의 외침에 사엘리카는 할 말을 잃었다.
‘뭘 목숨씩이나.’
지금이 그럴 상황이던가?
그러나 사엘리카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심각했다.
카이슈리트가 잘됐다는 듯이 사엘리카에게 속삭였다.
“다행히 아무도 우리 약혼식을 반대하지 않네. 잘됐지?”
싱긋 웃는 얼굴은 여름철 나뭇잎을 간질이는 바람처럼 싱그러웠다.
사엘리카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슈리는 정말 강력한 황제가 될 거야.”
상대의 약점을 잡아 쥐고 흔드는 기술이 정말 대단했다.
단숨에 서로를 적대시하게 만들고 은근슬쩍 원하는 것까지 챙기다니.
무릇 강력한 황제란 이간질…… 아니, 정치질에 능해야 했다.
“누구 남편인데 당연하지.”
슈리의 긴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살살 눈웃음치는 모습에 사엘리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카이슈리트는 정치술에 재능이 있었다.
* * *
황제— 아니, 이제 선황제가 된 레넌툴로즈는 아주 기분 좋은 얼굴로 외쳤다.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결혼식을 열 것이다! 가장 성대하고 아름답고 웅장한 결혼식을!!”
본인이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레넌툴로즈는 제일 신이 났다.
마칸도르 공작은 체스 말을 움직이며 말했다.
“말씀은 바로 하시지요. 결혼식이 아니라 약혼식입니다.”
“이 결혼식은 내 치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위대한 업적이 될 것이다!”
“무슨 결혼식 여는 게 황제의 마지막 업적입니까?”
마칸도르 공작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결혼식을 쓸데없이 사치스럽게 열어봤자 백성들이 욕할…… 아니, 욕하진 않겠군요.”
선황제가 화려한 결혼식으로 국고를 낭비한다고 욕하기엔 백성들은 사엘리카를 너무 사랑했다.
소박한 결혼식을 열면 역으로 황가가 욕을 먹을 것이다.
세계를 구한 대성녀를 저렇게 대접하냐고, 악랄한 시가라며 도끼눈을 뜨겠지.
“후대 사람들이 욕할 겁니다.”
“아니. 길이길이 내 마지막 업적을 칭송하겠지! 우리 아가의 결혼식을 성공적으로 잘 치르는 건 그만한 가치가 있다.”
“아드님의 결혼식이기도 하다는 건 잊으셨습니까? 그리고 결혼식이 아니라 약혼식—.”
“그리고 내 사재 쓸 거야.”
“……!”
건성으로 대꾸하며 체스 말을 옮기던 마칸도르 공작은 진심으로 놀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 선황제 레넌툴로즈가 사재를 쓴다고 말하다니!
레넌툴로즈는 솔직히…… 짠돌이였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가끔씩은 ‘기분이다!’ 하면서 사재를 풀 법도 한데 그런 법이 없었다.
딱 한 번 풀려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대성녀 선발전 때였다.
노이슈라헬 대공가와 에켈란 공가 그리고 화이트펄 상단과 ‘빵을 사랑하는 언니들의 모임’에서 사엘리카에게 조공했을 때.
“나도! 나도 저런 조공할 거야!”
“폐하, 대성녀 선발전에서 황족이 특정 성녀에게 조공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세금을 특정 성녀에게 쓰면 안 된다는 걸 잘 아시는 분께서 왜—.”
“내 사재로 조공할 거다!”
“……예?”
“내 돈 내가 원하는 대로 쓴다는데 뭐가 문제야?”
당시 마칸도르 공작과 시종은 레넌툴로즈를 말리느라 한참 진땀을 뺐다.
“지, 진짜로 사재를 쓰실 생각입니까?”
“원래 며늘 아가 사랑은 시아빠의 몫이라 했다. 우리 아가를 위해서라면 무엇인들 아까울까.”
‘진짜 중증이시군.’
마칸도르 공작은 감탄했다.
“체크메이트. 폐하께서 또 지셨습니다.”
감탄은 감탄이고 승부는 승부였다.
레넌툴로즈의 얼굴이 옴팡 일그러졌다.
마칸도르 공작이 슬쩍 말했다.
“뭐, 폐하께서 곧 있을 제 생일에 사재로 선물이라도 챙겨주시면 한 수 물러드릴 수 있습니다. 아니, 두 수— 세 수라도 무를 수…….”
“미쳤나? 내 아까운 돈을 공작에게 왜 줘? 그냥 공작이 이긴 걸로 끝내.”
“…….”
마칸도르 공작은 살짝 상처 받았다.
그래도 황제의 최측근으로 지낸 세월이 있는데.
* * *
아르테미아 신전 제도 지부.
“뭐? 선황제가 약혼식을 주관하겠다며 나섰다고?!”
“누구 약혼식인데 선황제가 끼어든단 말입니까!”
쾅!
아르테미아 신관들이 거칠게 테이블을 내려쳤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테이블이 쩌적 갈라질 기세였다.
신관들이라기에는 다소 폭력적인 모습이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솔직히 약혼식을 하는 것 자체도 불만이지만, 꼭 해야 한다면—.”
“우리가 주관해야지!”
“맞습니다!”
신관들이 발을 구르며 외쳤다.
마땅히 약혼식은 동부에 있는 아르테미아 신전 본관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성녀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곳은 성녀의 안식처이자 집인 신전이니까.
“조용히.”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대신관이 손을 들었다.
흥분했던 신관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사엘리카는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이 신전에서 자란 우리의 성녀, 우리의 가족이다.”
“…….”
“그러니 이 약혼식을 주관하는 건 당연히—.”
정적 가운데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대신관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날카로운 예기가 서린 눈이 번뜩이는 안광을 발했다.
위압감 넘치는 카리스마에 신관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할찌다!”
“…….”
잠깐의 침묵.
그리고.
“우와아아아아아!”
“대신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아무리 제국의 황실이라고 해도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아 갈 순 없습니다!!”
누가 보면 대신관이 출정 연설이라도 했다고 착각할 기세였다.
‘우리 신전 진짜로 괜찮은 거 맞나?’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 일레이는 홀로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
.
한편, 노이슈라헬 대공저.
그곳의 분위기 역시 심상치 않았다.
“선황제에 아르테미아 신전까지.”
“아주 다들 제멋대로군.”
으득, 노이슈라헬 대공이 이를 갈았다.
오랜 시간 끝에 되찾은 사랑하는 딸이 집에 돌아와서 머물렀던 건 딱 하루뿐이다.
애가 타 아이를 붙잡고 조금만 더 가족 품에 머물러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그럴 수도 없었다.
대성녀 선발전이 끝나면, 재앙을 막아내면.
매일 나중을 기약하며 참고 참았다.
“그런데 약혼이라니……!”
아예 가족 품을 떠나 새 가정을 꾸리겠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약혼식에서마저 가족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넘쳐났다.
“우리야말로 사과의 친가족인데.”
“태생부터 정해진 결코 끊을 수 없는 천륜이지.”
두 아들들의 말에 노이슈라헬 대공이 딱딱한 얼굴로 말했다.
“알겠나? 이건 전시 상황이다.”
“예!”
“노이슈라헬 대공가와 에켈란 공가의 전력을 총동원한다.”
대공과 제독의 총동원령!
전시에도 흔하지 않은 명령이었다.
“암막.”
“존명.”
“적월.”
“명을 받듭니다.”
“설표.”
“부디 명령을.”
“흑진주.”
“예, 주군.”
노이슈라헬과 에켈란의 전력들이 속속히 고개를 숙이며 명을 받들었다.
그들의 눈은 어느 때보다 비장했다.
‘아직 인사도 못 드린 막내 공녀님을 뺏길 순 없다!’
그 흉흉한 눈빛을 본 대공과 제독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적들에게 지옥…… 아니, 누가 사엘리카의 아빠인지 보여줄 때였다.
그리하여 역사서에까지 기록될 ‘약혼식 쟁탈 사건’의 서막이 올랐다.
* * *
“고민이네. 다 잘 어울려서.”
슈리가 내 얼굴에 보석을 대며 말했다.
“역시 다 할까.”
“보석을 그렇게 주렁주렁 달고 있으면 오히려 촌스러울걸.”
“그건 다른 사람 이야기고.”
슈리가 씨익 웃었다.
“넌 상관 없어. 아무리 많은 보석을 걸치고 있어도 네 얼굴만 눈에 들어오니까.”
“…….”
순간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슈리의 말이 어이없어서가 아니다.
저 닭살 돋는 말에도 은근히 기분이 좋아지는 내가 어이없어서다.
‘나도 갈 데까지 갔구나.’
뜨뜻해진 뺨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이대로 가다간 슈리가 세상의 모든 보물들을 내게 다 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화제를 바꿨다.
“근데 정말 깜짝 놀랐어. 왜 대관식에서 청혼을 한 거야?”
그 탓에 대관식 때부터 신문을 비롯한 마나망까지 우리의 약혼 이야기로만 가득했다.
대관식은 황제로서 슈리의 첫 행보.
가장 중요한 날이다.
그런데 새 황제의 즉위보다 내 결혼 이야기가 더 이슈가 되다니…….
“기다리기 힘들어서.”
“…….”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러고 싶었거든.”
장난스러운 말과 달리 슈리의 몸이 나를 뒤덮었다.
견고한 팔이 내 허리를 감았다.
지척에서 눈이 마주쳤다.
“어떻게 하고 싶었는데?”
“알고 싶어?”
입술이 더 가까워졌다.
닿을 듯, 말 듯.
나는 팔을 들어 슈리의 목을 감았다.
슈리에게서는 아주 좋은 향기가 났다.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을 누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회귀 전에 너는 이름도, 존재조차 빼앗긴 채 살아왔잖아.”
언젠가 들었던 슈리의 목소리가 다시금 떠올랐다.
슈리가 대관식에서 내게 청혼한 건 아마도…….
“그러니까 이번에는 네 이름만 있으면 돼.”
‘그런 날마저 내게 양보하고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다니.’
이 남자는 어디까지 내게 내어주는 걸까.
곧 그런 생각마저 흩어졌다.
뜨겁고 질척이는 감각이 머릿속의 생각들을 다 휘저어놓았다.
이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슈리가 주는 감각 외에는…….
그때였다.
“꿀빵!”
커다란 외침과 함께 거실쪽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슈리를 확 밀쳐냈다.
“뭐야? 꿀빵 어딨지? 낮잠 자나?”
문 너머로 드미트리의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났다.
안 나가면 침실 문을 열어젖힐 기세였다.
나는 재빨리 슈리를 창문 밖으로 밀쳐냈다.
‘여기 5층이지만……. 뭐, 알아서 살아남겠지.’
나는 서둘러 소거실로 나갔다.
“꿀빵!”
나를 보고 드미트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
“어? 내가?”
“혹시 어디 아파?”
걱정 가득한 순진무구한 드미트리의 얼굴을 보니 양심이 아팠다.
‘아니, 사귀는 사이에 뽀뽀 정도는 할 수 있지!’
나는 기죽은 양심을 다시 살렸다.
“많이 아파? 신성력이 안 받쳐줄 정도로? 아플 땐 혼자 앓지 말랬잖아!”
“…….”
양심이 기가 팍 죽다 못해 쪼그라들었다.
나는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근데 난 왜 찾았어?”
“아, 그게…….”
드미트리가 우물쭈물하다 말했다.
“비아트릭스가 죽었어.”
“뭐……?!”
비아트릭스가 죽다니.
그 첨탑 안에서 죽는 것도 쉽진 않을 텐데 어떻게?
“아멜리아는?”
“…….”
내 물음에 드미트리가 입을 다물었다.
대답은 뒤늦게 들어온 일레이에게서 나왔다.
“사라졌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