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est on Top RAW novel - chapter (297)
막내온탑-297화(297/299)
비아트릭스에게 이변이 생겼다고 했을 때 아멜리아의 신변에도 이상이 생겼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사라졌다고?”
“그래.”
“대체 어떻게……?”
첨탑을 탈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 의문에 에드먼드가 답했다.
“비아트릭스를 죽여서 틈을 만든 모양이야.”
“뭐?!”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멜리아가 비아트릭스를 죽이다니.
‘어떤 의미로는 진짜 파르마나스의 성녀다.’
파르마나스의 분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았다.
그냥 성녀가 아니라 파르마나스의 편린까지 품고 있었으니까 더 닮았겠지만.
‘비아트릭스가 얼마나 아멜리아를 오냐오냐하며 키웠는데.’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아멜리아에게 배신 당해 죽었으니 비아트릭스로서는 그냥 사형 당하는 것보다 훨씬 비참한 최후였을 터.
‘파르마나스를 도와서 천계와 창조주를 거스르는 데 일조했으니 죽어서도 안식을 찾지 못하겠지.’
십수 년 전부터 비아트릭스의 농간 때문에 죽은 사람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비아트릭스는 죽어서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미사 놈이 데려가겠네.’
비아트릭스는 미사 놈과의 계약을 편리한 도구쯤으로 생각한 모양인데, 그럴 리가 있나.
안 그래도 미사 놈은 심통이 난 상태였다.
자신과 계약했던 타락한 영혼을 고이 두고 볼 리 없다.
‘……비아트릭스가 좀 불쌍하게 느껴질 지경인데.’
나는 미사 놈의 취미를 떠올리다가 멈칫했다.
“아니, 잠깐만.”
“……?”
“아멜리아가 첨탑 안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비아트릭스를 죽인 거야?”
“그렇대.”
“어떻게?”
“머리 장식을 숨기고 있었나 봐. 그걸로 푹.”
일레이가 찌르는 시늉을 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한데.”
“이상하지.”
비수가 되어 단번에 목숨을 앗아갈 정도의 머리 장식을 숨기고 있었다고?
적어도 바늘침 같은 크기는 아닐 것이다.
만에 하나 바늘침 같은 크기라고 해도 이상했다.
“첨탑은 슈리가 직접 명령을 내려서 관리하고 있지 않아?”
“그렇다고 들었어.”
슈리는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이었다.
지난번 첨탑에 방문했을 때를 생각해도 그렇다.
안에 걸려 있는 수십 종의 마법을 보고 속으로 얼마나 깜짝 놀랐던가.
마법뿐만이 아니라 물리적인 감금 장치도 엄청났다.
‘거기다가 아멜리아를 괴롭히기 위해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이 재생되도록 해놓기까지 하고…….’
그렇게 철저하게 관리를 하면서 머리 장식을 놓쳤다고?
그걸 이용해서 비아트릭스를 죽이는 것조차 막지 못했고?
만약 빠르게 발견했다면 비아트릭스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아멜리아는 이제 신성력도 사용하지 못할 텐데.”
“설마 아직도 사용할 수 있나?”
“말도 안 돼.”
애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거, 슈리의 계략 아냐?’
물론 아닐 수 있지만.
아직 남아 있는 파르마나스의 끄나풀들이 첨탑에 첩자로 있었을 수도 있고.
‘근데 왜 자꾸 의심이 되지?’
* * *
제도의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대성녀 선발전 때문에 각지에서 몰렸던 사람들이 아직 돌아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성녀 대관식과 이어진 재앙의 극복.
신 황제의 즉위 그리고 곧 있을 대성녀와 황제의 약혼식까지.
날이 갈수록 더 사람들이 몰렸다.
툭.
어쩔 수 없이 사람들끼리 부딪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 죄송—.”
사과를 하던 행인은 부딪친 상대가 로브를 푹 뒤집어쓰며 자리를 피하자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자기도 잘못했으면서 저렇게 무시하고 쌩 가버릴 건 뭐람?”
“어휴, 성질이 꼭 그 가짜 같잖아?”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아멜리아는 더 로브를 푹 뒤집어쓰며 욕을 삼켰다.
‘젠장. 감히 이 내가 누군지 알고.’
‘그 가짜’는 아멜리아를 뜻하는 말이었다.
‘나를 가짜라고 말하는 것으로 모자라 욕처럼 사용하다니!’
분하고 원통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더 고개를 숙이는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내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살아야 해?’
아멜리아는 어느 때나 당당했다.
한 번도 스스로를 숨긴 적도,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멜리아를 알아보는 순간 모든 사람이 그녀를 칭송했으니까.
어떻게든 연을 맺고자 안달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쓰레기를 뒤져 먹는 시궁쥐처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니다니!’
자신을 향했던 그 수많은 찬사는 지금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들었어? 화이트펄 상단에서 대성녀님의 약혼식을 위해 새로운 꽃 품종을 개발한다며?”
“노이슈라헬 대공저로 온갖 보물을 실은 마차 수십 대가 들어갔다던데.”
“혹시 아르테미아 신전에 선물을 기부하면 대성녀님의 약혼식에 전달될 수 있을까?”
까드득.
아멜리아는 이를 갈았다.
그 끔찍한 첨탑에서 탈출했다는 기쁨도 잠시.
거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 재수 없는 사엘리카에 대한 것뿐이었다.
‘보는 눈 없는 머저리들!’
자신은 무려 신의 편린을 품고 태어난 고귀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 도둑년이 모든 것을 앗아갔다.
자신을 그렇게나 사랑해주던 비아트릭스조차도 빼앗겼다.
‘나는 이렇게 처참하고 아픈데 그 버러지는 결혼이나 약속하며 행복해한다고?’
이건 너무나도 불공평했다.
스스로가 애처롭고 처량하고 가련했다.
그때였다.
툭, 몸을 부딪치는 바람에 아멜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로브를 끌어당겼다.
그런데.
“아멜리아 님?”
“……!”
아멜리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사, 사람 잘못 봤어요.”
말하고 나니 더 비참했다.
이제는 아예 스스로를 부정까지 하다니.
“정말 아멜리아 님이시군요.”
“아니라니—.”
“이렇게 아멜리아 님을 만나다니 파르마나스 님의 은총입니다.”
“……?”
아멜리아는 멈칫했다.
그제야 아멜리아는 상대의 말이 공손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행인들처럼 ‘그 가짜’, ‘그 악마’, ‘그 사기꾼’이라고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상대의 키가 커서 한참 고개를 들어야 겨우 얼굴이 보였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미소 짓는 얼굴은 남자답게 잘생겼다.
다부진 체격에 은은하게 풍기는 기세까지.
아멜리아는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 남자, 평범한 사람이 아니야.’
생긴 것도 그렇지만 입고 있는 옷은 고급스러웠다.
무엇보다—.
‘무력이 엄청나잖아?’
아멜리아는 우선 경계했다.
이 세상은 예전처럼 아멜리아에게 상냥하지 않았으니까.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예, 아멜리아 님께는 아직 경험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
“제 주인께서는 아멜리아 님 같은 분이 첨탑에 갇혀 계시다는 것에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는지 모릅니다.”
‘주인이 따로 있나?’
아멜리아는 놀랐다.
이런 대단한 남자를 부리는 자라면 필시 막강한 권력자일 터.
두근.
기대로 가슴이 뛰었다.
‘역시 세상은 나를 버리지 않았어!’
당연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사엘리카 같은 도둑놈 따위가 아니라 자신이니까!
하지만 아멜리아는 바로 믿는 대신 차근히 남자를 살폈다.
비록 힘을 대부분 잃었지만, 아직 그 잔여물이 남아 있었다.
신이 아닌 귀신이 숭배 받아서 정도 이상의 힘을 낼 수 있는 것처럼, 아멜리아 역시 마찬가지다.
아직 파르마나스의 잔당이 남아 있는 만큼 어느 정도의 능력은 있었다.
‘거짓말은…… 아니야.’
“제 주인님께서는 아멜리아 님과 인연이 있으시답니다. 여기.”
심지어 상대는 파르마나스의 성물을 꺼냈다.
아멜리아가 예전에 자신을 따르는 부자 신도들에게 선물했던 성물 중 하나였다.
‘아아, 그렇구나.’
성물을 확인한 아멜리아가 미소 지었다.
‘나를 원하는 남자들은 많았지.’
아멜리아를 추종하며 어떻게든 마음을 사기 위해 애쓰는 남자들은 많았다.
이 남자의 주인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간 아멜리아 님께서 해온 일이 있으신데. 그렇게 평생 첨탑 안에서 지낼 수는 없지요.”
남자는 여전히 진실만 말했다.
“저와 함께 가시죠. 아멜리아 님을 위해 모든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아멜리아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 * *
아르테미아 신전 제도 지부.
“으아, 진짜 지쳤어.”
사엘리카는 침대에 엎어졌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창밖으로 집어 던졌던 슈리를 달래주고, 아르딘 아빠와 세르주 삼촌의 쇼핑 놀이에 동참해주고, 삐진 아르테미아 신관들과 티타임을 가지고, 시도 때도 없이 부르는 선황제에게 거절 연락을 넣고, 약혼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언니들에게 대답할 말을 고민하고…….
‘거기에 왕자들이랑 수인들이랑 엘프들이랑 용인족들은 왜 아직도 돌아가지 않는 거야?’
이쯤 되면 돌아갈 때가 되지 않았나?
매번 기도한답시고 아르테미아 신전을 방문해서 약혼을 다시 생각해보라며 성화였다.
“약혼식 준비가 이렇게 힘든지 몰랐어.”
사교를 추적하고 파르마나스 놈들을 팰 때보다 더 지친다.
다른 건 생각할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하지 말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사엘리카는 고개를 들었다.
커튼을 치던 일레이가 사엘리카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일레이는 항상 사엘리카의 방을 확인했다.
이상한 잡것이 숨어들 수 있으니 잘 확인하고 방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누가 숨어들어도 내가 더 셀 텐데.’
일레이가 이런 문단속을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서 말리진 않았지만.
“일레이까지 약혼 반대야?”
뚱한 사엘리카의 물음에 일레이는 대답 없이 미소 지었다.
사엘리카는 어깨를 으쓱이며 천계와의 연결을 열었다.
아스퀴엘: ……혼은 안 돼. 결혼은 안 돼. 결혼은 안—
엔리크: 어?!
세르하: 연결됐구나!
아나킨: 이 사고뭉치야! 허락도 없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카일루스: 잠깐! 내 동생을 다그치지 마. 겨우 연결됐는데 끊기면 큰일이다.
엔리크: 맞아! 일단 평범한 대화로 안심시킨 다음에 못하게 막아야지!
세르하: 아무튼 나는 이 결혼 반대이니라.
카일루스: 우리 모두 반대다. 사랑하는 내 동생아, 어리디 어린 네가 결혼이라니. 죽을 때까지 나와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고 싶은 게냐?
엔리크: 그래, 천 살 겨우 넘게 산 애가 무슨 결혼이야? 하여간 발랑 까져선.
아나킨: ……나 보고 다그치지 말라면서?
‘…….’
쏟아져 내리는 대화창에 사엘리카는 당황했다.
‘설마, 연결이 안 되어 있는 동안에도 계속 말 걸고 있었던 거야?!’
아스퀴엘: 사엘리카.
아스퀴엘의 말 한마디에 시끄럽던 대화창이 조용해졌다.
아스퀴엘: 진로 상담을 해야겠더구나. 천ㄱ
팟!
글자가 다 완성되기 전에 사엘리카는 서둘러 연결을 닫았다.
‘진로 상담만은 안돼, 진로 상담만은……!’
아스퀴엘의 진로 상담은 정말 끔찍했다.
‘이래서 앞으로 어떻게 살래?’ 부터 시작해서 온갖 잔소리가 폭발하는 것이다.
심지어 반성할 때까지 별일을 다 시켰다.
사엘리카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몸과 머리를 둘 다 써도 아스퀴엘은 꿈쩍하지 않았다.
아스퀴엘에게는 사엘리카의 거짓말과 불쌍한 척, 아픈 척뿐만 아니라, 주먹(!)조차 모두 간파해내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과거를 알게 되니 그냥 사엘리카를 도맡아서 키우는 바람에 얻은 후천적 능력 같지만.
‘음, 못 본 척하고 한동안 천계랑 연결하지 말아야지.’
지상에 있는 가족들은 모두 어떻게든 약혼식을 허락해준 데다가 참석까지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정작 형제들을 비롯해 아르테미아 님까지 약혼식과 관련해 어떤 말도 못하는 게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솔직히 감당하기 힘들어.’
지상의 가족들이 심통을 부려봤자 천계에 있는 형제들에 비하자면 온순했다.
아르테미아 님이야 워낙 자상하고 상냥하신 분이니 카이슈리트를 반대할 리 없으셨다.
‘그래도 내일이네.’
사엘리카는 돌아누우며 생각했다.
‘내가 약혼을 하게 될 줄은 진짜 생각도 못했는데.’
회귀할 때까지만 해도 상상치 못한 일이다.
사랑을 하고, 그게 이루어지고, 심지어 결혼을 약속하게 되다니.
그런 평범한 행복은 너무 멀게만 느껴졌었다.
“사엘리카.”
일레이가 다가와 침대 맡에 앉았다.
항상 미소 짓던 얼굴이 답지 않게 심각했다.
“행복해?”
뜬끔 없는 질문에 사엘리카는 눈을 깜빡였다.
행복하냐니.
사실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응.”
사엘리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자그마한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에 일레이는 숨을 멈췄다.
“행복해.”
아주 달콤하게 이어지는 말.
일레이는 눈도 못 떼고 사엘리카의 얼굴을 보다가 탁, 숨을 내쉬었다.
“좀 배알 꼴리네.”
“일레이는 심술궂은 면이 있으니까.”
사엘리카가 킥킥 웃었다.
일레이가 사엘리카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사엘리카 역시 일레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는 모르면서.’
일레이는 비뚜름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은 그 사실에 심술이 날 때가 있었다.
“……적당히 조금만 행복하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뭐?”
“견딜 수 있는 만큼은 좀 불행했으면 좋겠고.”
“야!”
사엘리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눈매가 완전히 뾰족해졌다.
“근데 역시 그냥 행복하기만 해라.”
툭.
일레이가 사엘리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부딪쳤다.
어린 날처럼.
“나는…… 역시 그거면 돼.”
사엘리카는 그간 너무 많이 힘들었다.
그건 곁에서 함께 해온 일레이가 가장 잘 알았다.
아무리 심술이 난다고 해도 사엘리카의 어깨에 제 무게까지 더해줄 필요는 없었다.
‘이 녀석에게는 끝까지 모든 것을 나눌 친구이자 가족이 필요하니까.’
사엘리카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일레이는 그 위치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일레—.”
“어서 자.”
일레이가 사엘리카를 눕혔다.
그리고 아주 어렸을 때처럼 몸을 토닥여주었다.
사엘리카가 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악몽을 꿀 때면 항상 그랬듯이.
일레이는 잠든 사엘리카를 한참 지켜보았다.
바뀌는 건 없다.
이전처럼, 혹은 지금 그렇듯이 일레이는 항상 사엘리카의 편일 것이다.
.
.
다음 날 아침, 약혼식 날.
싱숭생숭한 마음에 꼭두새벽부터 딸아이의 방을 찾은 란델은 깜짝 놀랐다.
“사, 사에?!”
사엘리카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