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est on Top RAW novel - chapter (299)
막내온탑-299화 (완결)(299/299)
* * *
지상으로 돌아오자마자 보인 광경에 사엘리카는 당황했다.
‘뭐야?’
카이슈리트의 곁에는 웬 여자가 딱 달라붙어 서 있었다.
심지어 그 여자는…….
“가짜다!”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여자가 외쳤다.
“아빠, 가짜예요!”
아멜리아는 노이슈라헬 대공과 에켈란 제독에게 쪼르르 다가갔다.
선수필승!
사엘리카가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반지의 주인이 따로 있다고?’
카이슈리트는 뭔가를 눈치챈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카이슈리트보다 대공과 제독 곁에 있는 게 더 안전했다.
딸이라면 껌뻑 죽는 자들이었으니까.
“아빠가 걱정하실까봐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실은 오늘 사라졌던 이유도 저 가짜 때문이었어요.”
아멜리아는 가련하게 눈꼬리를 내리며 노이슈라헬 대공의 팔을 끌어안았다.
“납치범들 틈에서 겨우겨우 탈출했는데 저로 변장해서 이런 짓까지 꾸미다니! 너무 무서워요, 아빠!”
아멜리아가 노이슈라헬 대공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등 뒤로 사람들의 경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납치라니, 설마……!”
“그냥 공 들여 준비하느라 늦으신 게 아니었단 말이야?”
“납치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사엘리카 님인 척 행세하다니……!”
사엘리카의 실종은 당연히 대외비였다.
실종 소식을 처음 들은 하객들은 당황했다.
‘후훗, 어때?’
노이슈라헬 대공의 품에서 아멜리아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결국 사람들이 선택하는 건 자신이었다.
‘이제 그 남자가 사엘리카의 모습을 다르게 바꿔주기만 하면…….’
완벽하다.
사람들은 사엘리카의 변신 마법이 풀렸다고 생각할 터.
사엘리카는 한순간에 가짜가 되는 것이다!
‘물론, 저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는 원래부터 가짜였지만.’
힐끔 사엘리카를 보니 더 기분이 좋아졌다.
‘어머, 많이 당황했나 봐?’
사엘리카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굳어 있었다.
저렇게까지 분노한 사엘리카는 처음 본다.
‘너도 아는구나? 네 패배라는 것을!’
저 얼굴이야말로 아멜리아가 승리했다는 증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외쳤다.
“감히 이런 더러운 수로 대성녀님의 약혼식을 방해하다니!”
“이딴 걸 보기 위해서 힘들게 경쟁률을 뚫고 약혼식에 참석한 게 아니란 말이야!”
“난 오늘을 위해 거금을 들여 전문가용 영상 마도구까지 구매했는데!!”
사엘리카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멜리아는 미소 지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정체를 밝혀라, 이 더러운 가짜!”
“이런 치졸한 짓을 벌일 사람은 아멜리아밖에 없어!”
“너 아멜리아지?!”
사람들의 비난은 사엘리카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아멜리아를 향하고 있었다.
‘왜 나한테……?’
정작 사엘리카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는데.
분노한 시선과 손가락질은 모두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왜…….’
탁!
갑작스럽게 강하게 밀치는 힘에 아멜리아는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아, 아빠……?”
믿기지 않았다.
지금 노이슈라헬 대공이 날 밀친 거야?
‘노이슈라헬 대공은 이제 나한테 껌뻑 죽어야 하잖아.’
하지만 노이슈라헬 대공은 충격받은 시선에도, 넘어진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재킷을 벗을 뿐.
화르르르륵!
노이슈라헬 대공의 손에서 오러가 피어올라 재킷을 태웠다.
“내 딸의 약혼식에 이딴 더러운 게 묻은 채 있을 순 없지.”
아멜리아가 닿은 재킷이 불결하다는 듯 단번에 태워버리는 모습.
아멜리아를 내려다 보는 푸른 눈은 만년설보다도 더 시렸다.
‘어째서……?’
먼저 가짜에 대해 말한 건 아멜리아였다.
정작 사엘리카는 지금까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고!
* * *
사엘리카의 모습을 한 아멜리아가 식장에 도착한 후.
사람들은 위화감을 느꼈다.
드디어 나타난 사엘리카의 모습을 보고 박수치며 환호하긴 했지만, 어쩐지 이상했다.
‘사엘리카 님이 저렇게 야살스럽게 미소 짓던가?’
카이슈리트에게 묘하게 끈적하게 미소 짓는 모습이 낯설었다.
‘하긴, 연인인 황제 폐하의 앞에서는 또 다를 수도 있지.’
그렇게 납득은 했지만, 이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렇게 늦다니. 일부러 폐하를 애 태우는 거야? 이게 바로 밀당?”
“밀당이라니, 천박하게. 그딴 건 남자들에게 인기 없는 너한테나 필요한 거겠지.”
“……어?”
“전부터 생각했는데, 헬레네 넌 좀 예의를 지킬 줄 알아야겠어.”
“사, 사엘리카?”
“사엘리카가 아니라 대성녀님. 옥타곤에도 들지 못한 레이아탄의 성녀 따위가 날 함부로 불러선 안 되지?”
“…….”
헬레네는 당황했다.
옆에 있던 에이레네와 자벨리나가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 사엘리카, 헬레네는 그냥 농담을—.”
“에이레네, 자벨리나. 너희도 마찬가지야. 대성녀님이라고 불러.”
사엘리카의 모습에 다들 당황했다.
“대성녀님께서 저런 말씀을 하시다니…….”
“이런 분이셨다고?”
“내가 그간 봐왔던 사엘리카 님은…….”
“야, 약혼식을 치르다 보니 생각이 많아지신 걸까요?”
결혼을 앞둔 신부가 우울해질 수 있는 것처럼, 약혼식에서도 그럴 수 있다.
사람들은 좋게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엘리카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세상을 구한 영웅이자 대성녀였다.
거기에 노이슈라헬과 에켈란이라는 두 대가문의 피를 이은 고귀한 신분은 물론.
이제는 황제의 약혼자이기까지 했다.
그런 사엘리카의 약혼식에서 험담을 하고 싶진 않았다.
다들 애써 좋게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랬는데.
‘역시 내 생각이 사실이었어!’
흥분한 사람들은 아멜리아를 향해 삿대질했다.
“겉모습만 따라 하면 우리가 속을 줄 알았냐?”
“어쩐지! 이상했어! 절대 사엘리카 님답지 않았다고!”
“너 아멜리아지? 이딴 추잡한 짓을 할 건 너밖에 없어!”
특히 헬레네와 에이레네 그리고 자벨리나의 목소리가 유독 컸다.
“야, 너 아까 나한테 뭐라 그랬냐? 어?”
“어쩐지! 엘렐레라고 안 부르더라!”
“우리 사엘리카는 자벨레, 엘렐레, 헬렐레라고 우리를 부르거든?!”
……끔찍이도 싫어하던 호칭에 어느새 정을 붙인 세 사람이었다.
‘그, 그 남자는……. 주인은……?’
아멜리아의 시선이 불안정하게 주변을 훑었다.
이내 사람들 틈에서 남자의 모습을 찾아냈다.
‘뭐 하고 있는 거야?! 어서 사엘리카의 외모를 바꾸라고!’
아멜리아는 애타게 남자를 노려봤다.
지금 이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열쇠는 그것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카이슈리트……?’
남자는 사엘리카의 모습을 바꾸는 대신 카이슈리트에게로 다가갔다.
고개를 숙이는 극진한 태도까지.
‘설마 주인이 카이슈리트 황제였어?!’
“죄를 뉘우치긴커녕 탈옥해 감히 대성녀이자 신의 딸인 척 사람들을 기만하다니!”
지엄한 황제의 목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아멜리아는 저를 감싸는 힘을 느꼈다.
눈부신 금발은 칙칙한 색으로 변하고, 하늘처럼 맑은 눈동자는 빛을 잃었다.
본 모습으로 돌아온 아멜리아는 빠르게 상황을 이해했다.
빠드득, 이가 갈렸다.
“네이놈, 날 속였구나!”
“속이다니. 난 항상 진실만 말했는데.”
남자가 빙글거리며 말했다.
“아멜리아 님께는 아직 경험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
“제 주인께서는 아멜리아 님 같은 분이 첨탑에 갇혀 계시다는 것에 얼마나 가슴 아파하시는지 모릅니다.”
아멜리아가 직접 거짓 여부를 확인했던 사내의 말들.
아멜리아는 이제야 그 진의를 깨달았다.
‘내가, 첨탑에 갇혀 있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한다는 뜻이었어……?’
벌벌 떨고 있던 아멜리아에게 손을 내밀어준 이유가 더 큰 절망에 빠트리기 위해서였다니!
생각해보면 비아트릭스를 죽이고 탈옥에 성공한 것부터 이상했다.
비참하다 못해 속에서 피가 끓었다.
그간 들떠 있는 자신을 보며 얼마나 비웃었을까!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아, 아멜리아 님!”
익숙한 얼굴들이 허겁지겁 홀 안으로 들어왔다.
파르마나스의 신관들이었다.
“사실입니까?!”
“아멜리아 님께서 비아트릭스 님을 죽였다는 게!”
“아니지요? 아멜리아 님께서 그럴 리 없습니다.”
“저희는 수모를 겪는 두 분만 생각하며 교의 부흥을 위해 숨어서 노력했는데. 거짓말이지요? 예?”
예상치 못한 등장에 아멜리아는 당황했다.
‘이들이 대체 어떻게……?’
아멜리아는 곧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았다.
대륙 곳곳에 숨은 파르마나스의 잔당들.
이들을 단번에 잡기 위해 카이슈리트가 수를 쓴 것이다.
파르마나스 잔당들이 아멜리아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필시 모여들 테니까.
‘이 악랄한……!’
아멜리아는 카이슈리트를 노려봤다.
황제로 즉위한 것에 이어 약혼식까지 치르는 와중에 이런 계략을 짜다니.
치밀하다 못해 무서운 남자였다.
무엇보다—
“—이 내가 고작 미끼였을 뿐이라고……?”
그것도 모른 채 완전히 놀아나다니!
카이슈리트가 고개를 까딱였다.
“더러운 벌레라도 활용할 방법이 있으면 활용해야지.”
“뭐야?!”
“아무리 하찮은 버러지들이라도 내 신부님을 귀찮게 할 수 있으니까 깨끗이 청소해야지.”
“…….”
“난 내 신부님이 나한테만 마음을 썼으면 좋겠거든.”
카이슈리트가 곱게 눈매를 휘었다.
단단히 미친놈이었다.
아멜리아가 할 말을 잃은 사이 파르마나스 신관들이 외쳤다.
“아멜리아 님, 왜 대답을 못 하시는 겁니까!”
“배교자들이 넘쳐나는데도 저희는 아멜리아 님만 믿으며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여전히 교에 헌신했는데……!”
“어떻게 당신의 어머니나 다름 없는 비아트릭스 님을!”
파르마나스 신관들마저 아멜리아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아멜리아는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움켜쥐었다.
‘왜 다들 나만 미워하는 거야?’
그냥 열심히 살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비아트릭스는 신혈로 이어진 어머니 아니야?”
“자기 엄마까지 죽이다니!”
“저 비열하고 더러운 살인자!”
아멜리아는 귀를 틀어막았다.
그래도 자꾸만 목소리가 들렸다.
첨탑 안에서부터 계속 그녀를 따라다니던 목소리.
지금 이 홀뿐만 아니라 바깥에 몰려 있는 사람들마저 자신에게 침을 뱉고 욕하는 모습이 생생했다.
“그만, 그만!!!”
바르작거리며 몸부림치던 아멜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이 와중에 사엘리카는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있었다.
아르테미아 신관들이나 노이슈라헬 대공과 공자, 에켈란 제독과 공자뿐만 아니라 엘프, 용인족, 수인들까지.
전부 사엘리카를 보호하듯 버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건 내 모습이었는데!’
“왜, 왜! 너만……!”
발작하듯 사엘리카에게로 달려가려던 아멜리아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강력한 힘이 아멜리아의 숨통을 조였다.
“더러운 게 내 신부님께 다가가면 안 되지.”
카이슈리트가 싱긋 웃었다.
* * *
아멜리아를 비롯한 파르마나스 잔당들은 모두 끌려갔다.
홀 안에 모인 하객들은 물론이고, 밖에 몰린 수많은 인파들 그리고 중계를 보던 마나망 속 사람들까지 아주 난리였다.
당장 저 비열한 아멜리아를 죽여라!
아니다. 죽이는 것보다 죽을 때까지 고통 속에 살게 해야 한다!
죽어서도 죗값을 치러야 해!
등등.
뭐,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모두의 바람이 다 이루어졌다.
산 채로 마계에 끌려갔으니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또한 마계에서 숨을 쉬는 것조차 인간인 아멜리아에게는 고통일 터.
거기에 미사 놈이 고이 내버려 둘 리가 없으니…….
‘아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나는 팔짱을 낀 채 슈리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거야?”
“나도 이렇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 조용히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네가 사라졌고, 아멜리아가 네 행세를 하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아니, 그게 아니라.”
약혼식에 예상밖의 이벤트가 생겼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뾰족한 눈으로 카이슈리트의 가슴팍과 팔을 훑었다.
“왜 아멜리아를 끌어안고 있었는데?”
“……끌어안진 않았—.”
“사이 좋아 보이더라? 다정하게 손도 잡고?”
“아니, 그건 구속—.”
“이대로 아멜리아랑 약혼하는 줄 알았지 뭐야.”
“…….”
카이슈리트는 입을 다물었다.
옆에서는 가족들이 잘한다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나는 카이슈리트의 어깨와 가슴팍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지상으로 돌아오자마자 본 게 아멜리아가 슈리의 어깨와 가슴을 끈적하게 더듬는 거였다.
진짜 화가 났다.
눈 돌아간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나도 아직 제대로 더듬어보지 못했는데!’
진짜 서럽고 억울하고 아까워서 다른 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어? 아멜리아랑 약혼하고 싶었던 거야? 내가 그때 안 나타났으면 아주 반지까지 껴줬겠다? 내가 아닌 걸 알면서도 왜 약혼식을 그냥 진행했어?”
유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이 멈추지 않았다.
저 귀한 빵을 어디 외간 여자한테 멋대로 내준단 말인가!
“알고 있었으니까.”
“……?”
“내 신부님이 약혼식 당일에 갑자기 사라졌어도, 내게 돌아와줄 걸 알고 있었으니까.”
슈리가 내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들어 제 가슴에 얹었다.
진심을 알아달라는 듯.
“그리고 이렇게 와줬잖아.”
푸른빛과 붉은빛이 섞인 황금빛 눈동자가 진지하게 나를 담았다.
그 눈을 마주하자 어쩐지 심통 났던 마음이 스르륵 풀렸다.
슈리의 진심이 느껴졌다.
단단하고 뜨겁고 견고하면서도 살짝 부드러운 게 진짜 촉감이 좋……이 아니라!
“근데 조금 기분 좋은데.”
슈리가 내게 속삭였다.
순간 내 속마음이 들킨 건가 당황했다.
“네가 이렇게 질투해주니까.”
“지, 질투는 무슨.”
괜히 멋쩍어서 중얼거리는데 가족들이 끼어들었다.
“자자, 거기까지.”
“떨어져, 떨어져.”
“이 요망한 여우 놈이 벌써부터 몸으로!”
나는 떨떠름하게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슈리가 황제인데.
슈리는 내 가족들이 뭐라고 해도 별 상관하지 않았지만.
‘나름 우리 아빠들이라고 대우해주는 걸까?’
고개를 갸웃하는데 이국의 왕자들이 말했다.
“저 놈이 질리면 언제든지 내게 약탈을 의뢰하시오!”
“남자 하나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실 때가 올 거예요.”
“무릇 남편은 다다익선이니 언제든지 저희에게 연락주세요.”
“약혼 정도야 쉽게 깰 수 있으니까요.”
“제국 황후는 귀찮은 일이 많으니 자유를 원하면 사막으로 오라고. 마중 나갈게.”
용인족 공주 테레제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크흡, 사에 님……! 사에 님과 가족이 되기만을 바랐는데! 하지만 기회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니까요! 저, 힘낼게요!”
“테레제, 자중해라. ……뭐, 사엘리카가 원한다면 용인족 영토에 와도 좋지만.”
“너에겐 우리 수인족처럼 전장이 어울리니 기다리고 있겠다.”
“무슨 소리냐. 야만적인 수인들과 달리 우리 엘프들이야말로 사엘리카와 오랜 인연이 있다.”
왕자들에 이어 용인족과 수인족 그리고 엘프까지.
‘생각해주는 건 고마운데 과연 이게 약혼식에서 들을 덕담일까?’
의아해하는데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처음 보는 남자였다.
“약혼 기간 재밌게 보내.”
하지만 나는 이 남자가 누군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내 손을 끌어당긴 남자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달링이 다른 남자랑 얼마든지 놀아나도 난 상관 없으니까.”
남자의 동공이 순간 길쭉하게 찢어졌다.
“베헤모른.”
“그럼 또 봐, 달링.”
윙크를 한 남자의 존재감이 흐릿해졌다.
‘엄청 삐진 줄 알았는데 벌써 풀렸나.’
하긴, 베헤모른은 원래 잘 삐지고 잘 풀렸다.
“나도 질투가 나려고 하는데.”
슈리가 속삭였다.
뾰로통한 표정이 진짜 귀여웠다.
나는 웃으며 슈리의 손을 잡았다.
내 약지에서 약혼 반지가 반짝였다.
선황제가 함박웃음을 지은 채 황금으로 만든 좌대를 내밀었다.
좌대 위에는 결혼을 약속하는 서약서가 있었다.
이 서약서에 서명을 하면 이제 나는 슈리와 정혼한 사이가 되는 것이다.
슈리의 전생과 내 회귀.
그 수많은 시간을 넘어, 비로소.
나는 천천히 내 이름을 적었다.
레이아르샤 사엘리카 노이슈라헬.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심해서 지어준 이름이 모두 다 들어 있었다.
고개를 드니 곧장 슈리와 눈이 마주쳤다.
단 한번도 내게서 눈을 뗀 적 없는 것처럼.
“이제 나를 진짜로 책임져야 해.”
속삭이는 목소리에 내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올랐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이 닿았다.
“와아아아아!”
“약혼 축하드립니다!”
“대성녀님과 황제 폐하의 앞날에 축복을!”
환호성이 울렸다.
수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나는 눈을 떠 슈리를 바라보았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내 예상대로 흘러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단단히 맞잡은 손과 나를 바라보는 슈리의 눈동자를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내 삶이 어떻게 흘러가든 무조건 행복할 거라고.
이 남자와 함께라면.
<막내온탑>,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