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ngest on Top RAW novel - chapter (96)
막내온탑 96화(96/299)
“너…….”
그 아이가 내게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도련님, 그래도 성녀님이십니다! 그렇게 대하시면…….”
다급히 말리는 사람이 있었다.
아까 그 카드 게임의 딜러였다.
내가 딜러로 골랐던 남자.
‘역시, 데미안의 보좌관이 맞았구나.’
내가 저 남자를 고른 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앞서 말했듯 데미안의 최측근 보좌관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데미안을 이렇게 만든 원흉 중 하나니까.’
회귀 전, 나는 저 남자가 비아트릭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티파티 시중인으로 일하고 있길래 딜러로 지정해서 살펴본 거다.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는지 확인하려고.
그리고 내 예상은 맞았다.
전문 딜러처럼 너무나도 능숙하게 카드를 섞던 손놀림.
그건 어느 곳에도 잠입할 수 있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카드를 건넬 때 보였던 손목뼈 쪽의 붉은 점.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점은 남자의 특징이었다.
‘시중인으로 있었던 건, 성녀들을 지켜보라는 데미안의 명을 받았기 때문이겠지.’
자신의 눈으로 삼을 정도로 데미안은 저 남자를 믿고 있다.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남자인데.
저 남자와 비아트릭스가 은밀히 주고받던 이야기는 아직도 확실하게 뇌리에 남아있다.
“데미안은 잘 크고 있니?”
“잘 자라고 있죠. 비아트릭스 님의 뜻대로.”
“불쌍한 아이. 저 때문에 동생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무너지고, 이제는 마검에 점점 물들어 감정도 잊게 되다니…….”
“하지만 결국 다 구원받게 될 거지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참으로 운이 좋은 아이이지요.”
비아트릭스가 설마 노이슈라헬 대공의 딸을 잃어버리게 했을까?
그건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비아트릭스가 그 상황을 이용한다는 거지.’
저 아이가 스스로 마검까지 쥘 정도로.
보통이라면 마검에 잡아먹혔을 터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 어린 나이에 마검을 이겨냈다.
실로 엄청난 재능이자 능력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거야.’
그 증거로 비아트릭스의 말처럼 회귀 전의 데미안은 서서히 마모되어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아주 중요한 어떤 부분을 잃어갔다.
비아트릭스는 그 부분을 흡족해했다.
때로 아멜리아에게 노래하듯 속삭이곤 했다.
“원래 사람은 부족하고 결핍되어야 한단다.”
새빨간 손톱을 한 손이 아멜리아의 턱을 살포시 붙잡았다.
“그래야지 신의 구원을 찾고 더 매달리게 되거든.”
“…….”
“새로운 북부의 대공도, 이 거대한 제국의 황태자도 다 네 구원을 바랄 거란다, 내 귀여운 아멜리아.”
“으음~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멜리아는 어깨를 좁히며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분들이 힘드시다면 저, 성녀로서 그분들을 도와드리고 싶어요!”
힘내겠다는 듯 주먹을 꼬옥 쥔 아멜리아가 해맑게 웃었다.
아멜리아는 몰랐을까.
데미안이 그렇게 힘든 이유가 전부 비아트릭스의 농간 때문이었다는 것을.
“뭐 하는 거냐, 데미안.”
귓가에 파고든 음성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에켈란 제독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데미안이 그를 보고 기세를 누그러트렸다.
“……제독님.”
“그 아이에게 함부로 굴지 말아라.”
데미안의 눈빛이 대번에 서늘해졌다.
“왜입니까?”
“왜라니.”
“설마 이것한테서 그 아이라도 겹쳐보시는 겁니까.”
데미안의 얼굴에 새파란 날이 섰다.
“주제도 모르는 건방진 게 감히 뭐라 했는지 아십니까?”
다시 나를 향한 데미안의 얼굴에는 분노와 열화 그리고 아픔이 가득했다.
“그 애는 네까짓 게 입에 함부로 담을 아이가 아니야.”
“…….”
나는 별 말하지 않고 데미안과 시선을 마주쳤다.
푸른 눈동자에 내 얼굴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 아이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려는 찰나, 다시 더 견고하고 날카로워졌다.
“그 손부터 놔.”
제독의 말에도 데미안은 별 반응이 없었다.
여전히 벼려진 날처럼 새파란 시선으로 나를 노려볼 뿐.
“데미안.”
에켈란 제독이 재차 부르고 나서야, 데미안은 떨쳐내듯 손을 놓았다.
나는 완전히 구겨진 옷깃을 붙들었다.
다행히 목이 졸리진 않았다.
그래도 나보다 배는 큰 아이에게 잡힌 건 은근히 충격이 있었나 보다.
어깨와 쇄골 할 것 없이 아팠다.
“사과야, 괜찮니?”
제독이 얼른 내게 다가왔다.
나는 괜찮다며 그에게 웃어 보였다.
엔리크: 저 새끼가!
엔리크: 맞는 말만 한다고 칭찬해줬더니 기껏!
엔리크: 감히 누구를 건드리는 거야?!
엔리크: 야, 지금 나 강림시켜.
엔리크: 야! 야!
아까부터 엔리크가 아주 난리였다.
‘엔리크가 내 멱살 잡고 독방에 처넣었을 때보단 안 아파.’
엔리크: ……그거는.
엔리크: 그건 이유가 있었잖아.
엔리크: 네가 17:1로 싸워서 17명의 날개를 골절시키지만 않았어도 난 안 그랬을 거야.
엔리크: 근데 그때 넌 튼튼했고 지금은 누르면 짜부될 물빵이고.
엔리크: ……많이 아팠냐?
엔리크가 이렇게 변명하는 걸 보니 조금 의외였다.
어쨌든 우물쭈물하더니 곧 잠잠해져서 편했다.
내가 데미안에게 상관하지 않으려고 한 진짜 이유.
그건 사실 내가 회귀 전에 한 번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성인이 된 데미안은 그야말로 북풍과도 같은 사람이라 그 누구에게도 곁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래서 좋았어.’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데미안에게는 나도, 다른 사람도 전부 똑같았으니까.
단 한 명, 아멜리아를 제외하고는.
그래서 나는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적어도 더 이상 마검을 쓰지 않도록.
혹은 그를 좀먹는 보좌관만이라도 떼어내도록.
그저 몇 가지 증거를 전해주는 것뿐이었지만, 나로서는 엄청나게 용기 낸 거였다.
하지만.
“뭐야, 너 대공님한테 또 수작 부리는 거야?”
“언제까지 아멜리아의 것을 뺏어야 만족하겠어?”
“그런다고 대공님께서 너 같은 걸 거들떠볼 것 같아?”
“주제도 모르는 게! 오냐, 내가 오늘이야말로 네 주제를 제대로 알려줄게!”
그에게 제대로 알려주기도 전에 나는 온갖 비난에 둘러싸였다.
데미안은 한 발짝 떨어진 채 그런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나를 구해준 건 아멜리아였다.
“어머나! 다들 그러지 마. 괜찮니?”
“데미안 님이 너무 멋지니까, 그래서 그랬나 봐요. 데미안 님, 용서해주세요, 네?”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해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에휴, 진짜.’
하지만 소중하다는 말이 날카로운 비수라도 되는 것처럼 아파하는 모습을 보니까.
다시 만난 데미안은 그때보다 한참 어린 아이라서.
‘나도 문제다, 문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다시금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곤자밈, 착한 아이야.”
데미안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무슨—.”
“구니까 너무 아푸지 마.”
“…….”
나는 까치발을 들었다.
그러고서도 내 손이 그 애의 머리에 닿기엔 무리였다.
데미안에 비하면 나는 꼬꼬마였으니까.
결국 하는 수 없이 그 애의 옷깃을 확 끌어당겼다.
절대 아까 멱살 잡힌 거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절대로.
“……?”
데미안은 조금 멈칫하며 나를 바라봤다.
‘무슨 애가 힘이 이렇게 세지?’ 하는 표정.
흥이다.
“시시, 아푸지 마라.”
나는 그 애의 머리를 토닥토닥해줬다.
미간을 찌푸린 그 아이가 내 손을 쳐내려던 찰나.
“그리고—.”
나는 그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데미안의 눈이 훅 커졌다.
데미안이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지금 뭐 하는 거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카이저였다.
“당장 떨어져.”
성큼성큼 다가오는 걸음걸이마다 살기가 피어올랐다.
흡사 성검으로 데미안을 베어버릴 기세였다.
“……내가 아니라 이 애가 날 붙든 건데.”
데미안의 말에 란델이 온화하게 웃었다.
“우리 사에는 워낙 상냥한 아이라서 옷에 붙은 벌레를 떼어주려고 그런 거겠죠.”
“일부러 내 토끼의 관심을 끌려고 벌레를 붙이고 다니다니.”
대신관의 은안에 날카로운 안광이 어렸다.
‘……세상에 누가 그런 이유로 일부러 벌레를 붙이고 다녀요.’
하지만 나를 제외한 모두가 진지했다.
“벌레를 잡아줘야겠군.”
“벌레는 해롭죠.”
“그래, 해충은 박멸해야지.”
‘아니, 왜 벌레를 검으로 잡으려고 해?’
카이저가 검을 빼 드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그, 그래도 대신관이랑 란델은 낫겠지?’
나는 희망을 갖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응, 아니야. 틀렸어.’
벌레 잡는데 왜 신성력을 응축시킨단 말인가.
꼭 누군가의 머리를 날려버릴 것처럼.
결국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따에 곤자밈이랑 둘이 걸어요. 약속해써. 구런데 왜 와써? (공자님이랑 둘이서 산책하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온 거예요?)”
내가 허리에 손을 얹자 세 남자가 멈칫했다.
“……너무 오래 안 나오길래.”
“혹시라도 무슨 위험한 일이 생긴 건가 우리 사에가 걱정돼서.”
“그래, 물에 빠졌을 수도 있고.”
온실에는 졸졸졸 물이 흐르고 있긴 했다.
내가 빠져봐야 무릎까지 올 정도로 얕았지만.
“거기다 저놈은 들어갔잖아.”
카이저가 턱짓으로 에켈란 제독을 가리켰다.
“나는 다르지. 데미안이랑 내가 어떤 사이인데.”
“대공자를 핑계로 꼬맹이를 보러 간 거잖아.”
“핑계라니, 나는 정말로—.”
에켈란 제독과 카이저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데미안은 이미 온실을 나가고 없었다.
* * *
아르테미아 신전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에켈란 제독이 엄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내가 데미안을 보면 따끔하게 혼내주마.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데미안은 제독이 혼낸다고 해서 들을 애가 아닌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제독이 시무룩해졌다.
“그게, 원래는 저런 녀석이 아닌데…….”
“따에두 아라요. 곤자밈, 너무 아야해서 그래.”
에켈란 제독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는 이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상처가 깊은 아이지.”
“…….”
“우리 사과한테는 그게 보이는구나.”
내 머리칼을 살짝 쥔 제독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이내 그는 표정을 바꿔 언제나처럼 쾌활하고 장난기 많은 얼굴로 말했다.
“하, 저 녀석도 남부의 햇빛 맛을 봐야 하는데 말이야. 해도 잘 들지 않고 찬바람만 숭숭 드는 북부에 있으니까 저 지경인 거라고!”
장난 같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하긴, 에켈란 제독도 데미안을 데려오고 싶겠지.’
하지만 친부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억지로 데려올 순 없을 거다.
무엇보다 데미안이 원하지 않을 테니까.
“그 녀석 이야기는 그만하지.”
“어차피 우리 사에랑은 다시 만날 일도 없는 아이니까요.”
“평생 만날 일이 없겠지.”
만날 일이 생기더라도 없게 만들어주겠다는 어조였다.
어떤 식으로 없게 만들지는…….
‘음, 생각하지 말자.’
눈을 시퍼렇게 빛내는 세 남자를 보니 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나마 데미안에게 멱살 잡힌 모습을 안 보여서 다행이다.’
분위기가 조금 안 좋았다는 것을 읽고도 이 지경인데, 그것까지 들켰으면…….
어후,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거 같은데.’
내가 마지막에 한 말 때문에라도 조만간 얼굴을 보게 될 것 같았다.
말해봐야 긁어 부스럼이니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오늘의 벌이!’
나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한가득 쌓인 성물을 바라봤다.
마지막에 나올 때까지 성물을 바라보던 다른 성녀들의 표정이 참 볼만했다.
‘히히, 달콤한 패배자들의 열패감이 느껴지는구나!’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성물을 쥐었다.
‘이건 내가 잘 써줄게.’
여러모로.
* * *
데미안은 침묵한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풍경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조금 전에 만난 자그마한 꼬마를 떠올리고 있었다.
‘…….’
푸른 눈동자가 느릿하게 움직여 제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그 아이의 멱살을 틀어쥐었던, 바로 그 손이었다.
‘분명 그 애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무언가 이상한 감각이…….
“도련님?”
데미안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돌리니 그의 보좌관, 자프레즈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불러도 답이 없으시기에…….”
“…….”
“오늘 만났던 성녀들에 대해 보고 중이었습니다만, 도착해서 서면으로 보고드릴까요?”
“필요 없다.”
딱 자른 말에 자프레즈가 멈칫했다.
“어차피 그 티파티에서 신경 쓸 성녀는 아르테미아 소속이 유일했어.”
“하지만 에이레네 성녀님도 그간 꽤 두각을—.”
“일찍 각성한 데다 나이도 가장 많기에 가지고 있던 이점이었을 뿐이지.”
“…….”
“그마저도 이제 막 각성한, 제일 어린 성녀에게 완패했다.”
자프레즈는 잠시 침묵하다가 만면에 미소를 만들어 보였다.
“역시 도련님이십니다. 혜안을 따라갈 수 없군요. 헌데—.”
그가 조심스레 데미안에게 물었다.
“혹시 아르테미아의 성녀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데미안의 푸른 눈동자가 지그시 자프레즈를 응시했다.
자프레즈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다.
오랜 시간 데미안의 곁에 있었지만, 저런 눈으로 볼 때마다 심장이 발밑으로 꺼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여기서 꼬리를 말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 게 뻔했다.
자프레즈는 애써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아까 제가 도착하기 전에 일이 있었던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리고 지금 도련님도 평소와는 조금 다른 듯해서…….”
“평소와 다르다?”
데미안의 목소리가 삐딱해졌다.
푸른 눈에 불쾌감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