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 cowardly winter RAW novel - Chapter 3
2. 너의 청봉리
청봉리는 엄마의 고향이었다. 엄마는 마트에 가더라도 꼭 청봉리에서 난 참외, 복숭아를 사다 먹곤 했다. 어린 시절의 맛이 기가 막히게 배어 있다나 뭐라나. 하다못해 굴러다니는 버섯도 청봉리가 낫다는, 엄마의 청봉리 애착은 종교에 가까웠다. 아마 외할머니로부터 비롯됐을 것이다. 엄마는 옥으로 된 명패를 가진 사장님이 꿈이었고, 과부인 할머니는 딸내미 뒷바라지에 정성이었다. 딸이 먹고픈 거, 하고픈 거, 배우고 싶은 거, 집을 담보로 빚내서라도 해줬다고 들었다. 그래서 동네에서 놀리듯 엄마를 금지옥엽이라 불렀다고.
그러던 엄마와 할머니가 원수보다 못한 사이가 된 건, 사윗감이라고 데려온 아빠 때문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고아든 뭐든 사랑했고, 유학을 포기했고, 나를 낳았고, 생각보다 힘들게 사업을 시작했다. 당연히 할머니는 머리에 흰 머리띠를 두르며 반대했다.
‘저것이 언젠가는 내 딸 잡아먹을 것이여.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어, 하는 일마다.’
아빠는 부모가 없었기에 할머니의 눈에 들고 싶어 했다. 맛난 거, 몸에 좋은 거, 남들이 부럽다고 할 만한 명품 가방, 싹싹 긁어모아다가 할머니에게 가져다 바쳤다. 하지만 할머니의 앙금은 쉬이 풀리지 않았고, 어린 내 눈에는 그런 할머니가 마귀처럼 보였다.
“왔냐.”
마당에 묶어둔 솔이가 짖는 소리에 할머니가 나오고 말았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보다 흰머리가 상깃상깃 나고, 구부러지셨지만. 그래도 할머니는 할머니였다. 널 임신하는 바람에 네 엄마가 유학을 못 갔다고, 서느렇게 흘겨보는 할머니 눈빛이 아직껏 선명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살갑게 구는 사람이 아니었다. 도리어 눈엣가시처럼 미워했으면 미워했지.
그럼에도 나는 이곳에 왔다.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도 이유는 하나였다. 갈 곳이 없었다. 며칠이고 몇 주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외지에 있고 싶은데, 호텔은 비싸고 모텔은 무섭고 그렇다고 신세 질 친구도 없고.
“밥은.”
할머니 집에 도착하고 보니 밤 깊은 자정이었다. 저녁을 안 먹었어도 먹었다고 대답해야 한다. 내가 대강 오는 길에 때웠다고 하자, 할머니는 한숨 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할머니 집은 마당을 한가운데에 두고 왼편에 집이 한 채, 오른편에 또 한 채가 있다. 하나는 시골 동네에서 유행하는 서양식으로 지은 것이고, 하나는 할머니가 좋아하는 한옥으로 조그맣게 지었다. 서양식으로 꾸민 곳은 할머니와 엄마가 잤고, 나와 아빠와 해경은 조그마한 한옥에서 잠을 잤다. 혼자 온 오늘도 다를 바는 없었다.
조그마한 방 두 개가 딸린 한옥에 들어서자마자 가슴 한가운데가 찌르르 울렸다. 이 한옥에서 밴 냄새가 추억을 불러왔다. 그래. 돈이니 뭐니 해도 이것 때문이었다. 여기는 내가 사랑한 이들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다.
그렇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설이니 추석이니 할 때마다 우리는 이곳으로 왔다. 아빠는 할머니 눈칫밥에 체하지도 않는지, 매양 웃는 얼굴로 이 한옥에서 잤다. 훗날 회사의 몸집이 커지면 할머니도 아빠를 인정할 거라고. 어디 두고 보라고. 그 인정을 위해서 두 분이 욕심껏 빚도 내고, 발톱 빠지게 출장을 다녔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을 해서 그런가. 나는 내 처지도 까맣게 잊고서 긴 잠을 잤다. 솔이의 밥을 주려고 나온 할머니가 내가 어디 아픈 줄 알고 깨우기 전까지 잤다. 할머니가 나를 마구 흔들기에, 슬그머니 눈을 떠서 봤더니 오후 2시였다. 정말 징글징글하게 잠만 잔 것이다.
“야, 해우야. 너 어디 아프냐.”
내 머리맡에 식혜가 있었다. 급하게 떠왔는지 그릇이 젖은 채였다. 식혜는 할머니가 만든 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거였다. 며칠 전에 이리로 온다고 전화를 드렸더니 그새 만들어주신 모양이다.
“아까 경이가 전화했는데. 너 여기 있냐고.”
“그래서?”
“여기 있다 했지.”
그럴 줄 알았다. 해경도 내가 갈 데가 여기밖에 없는 걸 안다. 아마 지금쯤 안심하고 라면이나 끓여 먹고 있겠지. 나는 잠긴 목에 차가운 식혜를 흘렸다. 달달한 맛이 혀끝부터 달려든다. 중간 중간 고소한 쌀알도 씹혔다. 머리가 아릴 정도로 차가운 것을 보니, 할머니가 바깥 장독대에 식혜를 넣어뒀나 보다. 참 달고 맛있었다.
“너 경이랑 싸웠냐.”
나는 그릇에 남은 식혜를 흔들어 마지막 남은 쌀알까지 입 안에 넣었다.
“그 나이 처먹고 싸우기는.”
할머니는 혀를 쯧쯧 차고 내게서 빈 그릇을 빼앗아가셨다. 한 그릇 더 먹으려는 속셈을 알아차린 듯 말이다.
“저쪽 집에 밥 있어. 밥 먹어.”
할머니는 볼일 때문에 잠시 나가본다고 하셨다. 나는 입맛을 쩝쩝 다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밥을 거른다고 하면 당장 식혜가 든 장독대부터 치워버리실 분이었다. 입맛이 없어도 먹는 시늉은 해야 했다.
노곤한 몸뚱어리는 어제 입고 온 그대로였다. 잠옷으로 갈아입을 새도 없이 바로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가져온 가방을 열고 대강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고등학교 때 체육복 바지를 꺼냈다. 시골길을 쏘다니려면 이 옷이 제격이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목도 축였고. 건너편 집에 밥만 먹으러 가면 되는데 의욕이 없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농땡이 피울 겸,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무리 눌러도 까만 화면에 의문이 든 것은 잠깐.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꺼두었던 기억이 살아났다.
김유을.
빠르게 핸드폰을 켰다. 초조한 나머지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토록 그를 무시하려던 게 아니었다. 적어도 도착해서 사정을 말할 생각이었다.
“미치겠다, 진짜…….”
부재중 38통. 톡 25개. 문자 8건. 전부 김유을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통화는 30분마다 해본 것인지 아주 일정한 시간대에 걸려왔다.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어젯밤 나를 애태웠던 연결음이 또 이어지기만 한다. 서로 통화 한 번 하는 게 데이트보다 어려웠다. 나는 핸드폰을 붙잡고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얼른 받아라, 얼른.
―손해우.
이제 막 포기하려고 할 때였다. 종료 버튼에 손이 간 순간, 김유을의 목소리가 사방을 채웠다.
“어. 유을아.”
바로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왔다.
―어디야.
“집은 아니야. 잠시 사정이 있어서.”
첫마디부터 상당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 진흙같이 질퍽한 목소리로 내게 비난을 우다다 쏟아냈다.
―기어이 가버렸네? 너 내가 그럼 응, 꺼져 줄게, 할 것 같지.
“유을아.”
―유을아, 유을아. 부르지 마. 꼬시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잖아, 너. 별 감정 없이.
목소리가 송곳이 되어 찌르는 것 같았다. 대단히 화났나 보다. 김유을은 머리끝까지 열 받으면 말이 많고 빨라지는구나. 상황이 그럴 상황이 아님에도 목소리가 꽤 매력적으로 들렸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를 밟으려고 들까 싶었다.
“유을아, 미안해. 화내지 마.”
―…….
“나 여기 할머니 댁이야. 원래 쉬고 싶어서 여기 내려오려고 했는데. 그게…… 너한테 말할 생각이었어. 말하고, 너한테 지금까지 못 한 말 다 하고.”
―안 믿어.
사실 김유을한테서 도망치고픈 이유는 변변찮았다. 나는 김유을에게 고상해 보이고, 잘나게 보이고, 완벽해 보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직장을 때려치우고, 동생한테 못된 누나 되고, 이래저래 내세울 게 없자 줄행랑을 쳤다.
여기까지 와서도 허영이 문제였다. 늘어진 티셔츠를 입은, 청봉리 할머니 댁에 얹혀사는 나를 보여줄 엄두가 안 났다.
여기서 눌러살면서 괜찮아지면, 다시 멋지게 나를 가꾸면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걔 앞에서는 시종일관 상냥해지고 싶었다. 아무 근심 없고, 아무런 흠이 없는 사람처럼.
“널 생각보다 많이 좋아했나 봐.”
생각으로 굴리던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렇게 불편하다고 염불을 외면서도 이별을 통보하지 못했던 이유. 청봉리로 도망치면서도 시간을 갖자고 한 구질구질한 이유. 아마 김유을이 고백했을 때 받아준 이유. 그가 사랑한다고 말했는지 안 했는지를 기억하는 이유. 별별 말로 다 포장해도, 실은 내 쪽에서 미련이 한 트럭인 것이었다.
―하.
김유을의 웃음소리가 넘어온다. 즐거운 게 아닌, 어처구니없는 웃음소리였다.
―안 넘어가니까 그런 말까지 해주네.
“유을아, 지금 말고 조금 이따가 통화하자. 너 운전 중인 것 같은데.”
―이따가 언제.
“나 밥 먹고. 너 운전 끝나고.”
―안 되겠는데.
때마침 솔이가 왈왈왈 소리 높여 짖었다. 김유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솔이는 충성스러운 시골 똥개였다. 할머니 마당에 들어오는 모든 이에게 짖어댄다. 복숭아 농장을 하는 옆집 아주머니가 수다 떨러 온 건가?
“여보세요. 유을아?”
―나와.
나는 핸드폰을 잠시 얼굴에서 떼어냈다. 얘가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릴 소리를 하는 거지.
“뭐?”
솔이의 짖음이 더욱 맹렬해졌다.
설마.
뻗친 머리카락을 정리할 새도 없이 바깥으로 나갔다. 통화는 이미 끊겼다. 핸드폰을 던져두고 슬리퍼에 발을 욱여넣는 순간이었다.
솔이의 거품 물 것 같은 인사의 주인공이 등장하셨다. 대문 앞에 세워진 차를 내가 몰라볼 리 없었다.
나는 꽁지에 불붙은 것처럼 뛰쳐나갔다. 그는 차에서 천천히 내린다. 그리고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로에게 이를 드러냈다. 비련의 주인공처럼 고상 떨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여기서 마음이라도 도닥거린 뒤에 떠날 예정이었다. 결정적 하자라도 메운 뒤에 말이다. 그러나 김유을은 나를 깨트리려고 작정한 모양이었다. 우리 둘 다 사나웠지만 그중 진짜 불붙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찐빵에 단팥이 있는 것처럼 당연했다. 여기서 황당한 건 나였다.
“여기에 네가 왜 와!”
김유을이 바람 빠진 듯 웃었다. 뿔나도록 차가운 비웃음이었다. 나는 그의 손목을 차 앞으로 잡아끌었다.
“돌아가. 이건 무례한 거야. 알아?”
“무례?”
김유을의 손이 내 손을 쳐냈다.
“내가 말했지. 가만히 껴져 줄게, 할 것 같으냐고.”
“여긴 대체 어떻게 알고 왔어.”
말하면서도 짚이는 구석은 있었다. 전화가 먹통이니 집으로 갔을 테고, 집에서 퍼질러 자는 해경을 만났을 테고, 해경의 입이 단서를 흘려주었을 테다. 예상이 꼭 들어맞았는지 김유을은 “네 동생.” 했다.
“그렇다고 와. 여기를?”
분노는 석유 위에 던져진 라이터 같은 것이었다. 고작 300원짜리 라이터로도 얼마든지 불을 피워낼 수 있었다. 그것도 잠잠하던 초가삼간 다 태워 먹을 불을.
“가.”
발가락 나온 슬리퍼, 무릎 나온 체육복 바지, 만둣집 고무줄로 묶은 머리칼, 쇄골 보이도록 늘어난 티셔츠. 그가 어떤 다짐을 챙겨 가지고 왔건, 이 상황은 내게 잔인했다. 뙤약볕 아래 메말라가는 개구리를 나뭇가지로 찔러보는 거나 다름없었다.
“나 좀 내버려둬.”
멀거니 서 있는 그의 어깨를 밀었다. 도통 밀려나지 않자 주먹으로 치기까지 했다.
“내가 나중에 연락한다고 하잖아. 꼭 이렇게……!”
꼭 이렇게 나를 들추고 찔러봐야 알겠니?
그 말은 목구멍에서 막혔다. 김유을은 때리면 때리는 대로, 소리 지르면 지르는 대로 받았다. 화풀이란 걸 알면서도 악에 받친 내가 흥분할라치면 어깨를 쓸어 만졌다. 어느새 분노는 내 몫이 되었다. 쪽팔린 게 나뿐이란 소리였다.
그때 끼이익 하고 대문이 열렸다. 할머니가 마실을 벌써 다녀오신 모양이다. 양쪽이 다 망했다. 쇳조각이라도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머니에게 추한 싸움을 들키기 싫었고, 김유을에게 여기 사는 나를 들키기 싫었다. 대안이 없어지자 죽 쑨 자존심에 원망의 망울이 졌다. 그를 매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수치심이 분노로 바뀐 경우였다.
“우야. 누구…….”
할머니의 손가락이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은 나를 가리켰다. 아니다. 가리킨 건 김유을이었다. 할머니는 김유을을 알아본 듯한 눈이었다. 마을 회관에 촬영 온 연예인 보듯이 놀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유을의 태도였다. 아까의 얼굴을 싹 지우고 고개를 숙였다.
할머니에게 김유을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당연히 이름이나 나이도 알려준 적 없었다. 지나가는 말로 사귀는 이가 있다고 했을 뿐이었다. 할머니는 청봉리에서 평생을 사신 분이라 절대 김유을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일전에 만나본 것처럼 굴었다.
기가 찼다.
혹시 김유을의 이목구비가 낯익은 것일까. 할머니의 유일한 취미가 티브이 보기였다. 특히 트로트가 나오는 프로, 요리 대결하는 프로, 연속극 드라마는 빼지 않고 보신다. 그중 할머니가 좋아하는 요리 프로에 김유을의 아버지가 나오시긴 한다.
김권영 셰프는 유명한 한식 장인이었고, 부자지간은 안 닮았다고 하면 서운할 정도였다. 물론 그의 아버지니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러한 사정으로 할머니가 아는 척한 걸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에 할머니의 눈썰미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할머니는 동네 창피하게 거기서 그러지 말고 들어오라고 했다. 할머니가 대문을 열었고, 우리는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무심결에 알록달록한 내 슬리퍼를 보고서 창피했다. 목이 쉬어라 짖어대는 솔이와 오래된 한옥도 부끄러웠다.
차라리 꿈속이라면 믿을 만했다. 그가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서, 나와 함께 마당을 지키고 선 게.
이미 할머니에게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내 지인이라고 만나본 적 없는 우리 할머니 눈에 김유을은 신선한 말동무일까. 마당에 서서도 노려보는 우리를 보곤, 할머니가 아예 김유을을 집 안으로 들였다. 뜬금없는 부탁과 함께였다.
“네 말이야. 수도꼭지 고칠 줄 아냐.”
할머니의 그 한마디에 가만히 있던 김유을이 발을 옮겼다. 할머니와 작정한 것처럼 합이 맞았다. “할머니!” 내 말은 무시한 채, 할머니는 당장 수도꼭지를 고쳐 줄 젊은이가 아쉬운 듯 그랬다.
나는 마당에 덩그러니 남았다. 갑자기 도둑인 줄 알았던 사람을 데려가 버려 머쓱해진 솔이와 함께였다. 우리 둘은 앉아서 멍하니 본채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아마 백두산이 무너져도 눈썹 하나 꿈쩍 안 할, 아주 둔하고 무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을이는.”
“몰라요.”
“전화해라. 이 무심한 것아.”
우리 할머니가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다. 허허허 웃던 아버지도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 우리 할머니인데. 김유을은 무얼 발라 구워삶았기에 할머니를 백팔십도 뒤집어놓을 수 있던 것일까.
처음에 있든 말든 시큰둥하던 할머니는 이제 유을이 없으면 찾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권영 셰프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찌어찌 안 모양이었다. 동네방네 그 소문 안 난 곳이 없었다.
김유을이 수도꼭지를 고치는 동안 어떤 음모를 꾸몄는지 모르겠다. 그놈의 손에서 나온 녹두전에 방을 내주고, 직접 끓여준 순두부찌개에는 마음을 내주고, 눈웃음친 맞장구에는 신뢰를 내줬다. 손녀의 열 마디보다 김유을의 콧방귀 한 번이 믿을 만한 게 돼버렸다.
하루만 묵자 했던 김유을은 하고 많은 방 중에 내 옆방을 골랐다. 첫날부터 쳐들어올 줄 알았지만 김유을은 우리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내려온 소처럼 일만 해나가는 중이다.
작정한 듯 구는 그 행동에 할머니가 어찌 넘어가지 않을쏘냐. 할머니들은 키 큰 청년들에게 유해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찬밥 신세인 나는 말할 것 없고, 할머니의 애정을 독차지하던 솔이조차 요즘은 개밥에 도토리였다.
거기다가 할머니의 친구들은 한술 더했다. 한식 프로그램에 나와서 사근사근 요리 알려주는 양반이라고 했던가. 나는 몰랐지만, 김유을의 아버지는 이 나잇대 주부들에게 트로트 가수 버금가는 인기를 얻고 있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김유을은 거의 그분들의 데릴사위였다.
지금도 김유을은 수명 다한 화장실 전구를 갈기 위해 시내로 나간 참이었다. 할머니는 친구분들에게 김유을을 자랑하고 싶어, 이놈이 어디서 뭐 하는지 묻는 듯했다. 무뚝뚝한 애인 덕분에 우리 할머니 살판나셨다. 손녀는 묵사발 된 속 때문에 죽을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오면 꼭 전화해라.”
“알았다고 몇 번 말하나…….”
“아이고, 가시나야. 집이라도 암거나 집어 입지 말고, 좀 좋은 거 입고 있어라.”
김유을이라는 복덩이를 내가 끌고 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요즘 나에 대한 대접도 융숭했다. 그러면 뭐 떡고물이라도 떨어지나. 어차피 김유을이 오면 나는 씹다 만 찬밥 신세인데. 게다가 할머니는 철저한 김유을 편이었다. 내가 두 사람이 어디서 만난 거냐고 아무리 물어도 함구하는 것이, 이미 입에 자물쇠 채우기로 합의 본 모양이었다.
치사한 할머니는 그렇게 친구분 댁으로 가고, 백수가 된 나는 본채 거실에 누워 있었다. 트로트 채널이 잔뜩 예약된 티브이를 감흥 없이 보다가, 잠시 밖에 나가서 솔이의 간식을 주다가. 정 지겨워지면 뒹굴뒹굴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잡생각을 피해 내려온 시골이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 상상도 못 한 김유을과 할머니의 인연. 나를 솔이 대하듯 하는 김유을. 내가 모르는 김유을. 두 얼굴의 김유을. 온통 그 생각뿐이다.
처음에는 늘어진 티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회사 다닐 때 입던 셔츠를 입었다가, 할머니한테 집에서 옷이 그게 뭐냐는 핀잔을 듣고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내가 군소리를 들을 때 김유을이 몰래 웃는 걸 보았다.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었다. 대체 7년 동안 그 머리통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던 건지.
그리고 때마침 복덩이 김유을이 들어왔다. 역시 나는 못 본 것처럼 지나쳐, 안쪽에 있는 화장실로 휘적휘적 걸어간다. 그쯤이면 나도 오기가 생겼다. 누가 먼저 말을 거는지 내기라도 해볼까.
바로 어제였다. 하루만 있다가 떠날 줄 알았더니 아주 눌러살 기세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김유을의 방문을 두드렸다.
몇 번 노크를 하자 그가 나왔다. 씻은 것인지 머리칼은 젖었고, 목에는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언제 갈 거야.’
일자로 다물린 김유을의 입술이 삐딱선을 탔다. 차갑고 비정한 웃음이었다.
‘여기 우리 할머니 집이야. 내가 말없이 여기 온 건 미안하지만…….’
‘미안?’
가만히 문간에 기대어 서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넌 미안해하지 않아.’
나는 지쳐 있었다. 지친 패배자가 숨으려고 온 것이었다. 해경과 싸우고, 김유을에게 이런 몰골을 들키고. 그것만으로 철렁 내려앉은 가슴이었다. 주저앉아서 기지개도 못 켜고 있었다.
‘가. 내일이라도.’
‘나 가면, 언제쯤 다시 만나줄 건데.’
김유을은 말없이 눈으로 물었다. 넌 언제쯤 괜찮아져서, 언제쯤 연락할 수 있으며, 언제쯤 서울에 돌아오는데. 이게 나아지기는 해? 그렇게 묻는 것 같았다.
나는 찾지 못한 대답이었다. 내가 언제쯤 나아질지, 언제쯤 다시 무얼 해볼 기력이 날지. 이러다가 청봉리의 망령으로 떠돌아다닐까 두려웠다. 계속 고장 난 듯 머뭇거렸다. 김유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면 헤어지자는 건가?’
목구멍이 감기라도 걸린 듯 쓰라렸다. 나는 입이 꿰매진 멍청이 같았다. 상대가 묻는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동전을 아무리 넣어도 음료 하나 못 뱉는 자판기 같았다. 생각도 귀찮다는 생각. 누가 내 눈앞에서 김유을을 치웠으면 하는 생각. 방문을 닫고 누워서 귀를 막고 싶다는 생각. 수리도 못 할 만큼 자판기가 망가졌다.
김유을은 아무 말 못 하는 나를 보다가 방문을 닫았다.
그 후로, 안 그래도 서먹하던 우리는 아예 상대가 투명하다는 듯이 생활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앞으로 갔다. 일부러 쭈그리고 앉아 그를 구경했다. 김유을은 더운지 하얀 긴소매를 걷어붙인 채였다. 고심하는 것처럼 전구를 둘러보더니, 불이 꺼진 천장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그리고 손을 뻗는다.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자, 그가 화장실 문간 쪽을 바라봤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이다.
그의 눈길이 나를 더듬는다. 꼬질꼬질한 내 몰골이 창피했지만 어차피 이러고 산 게 어제오늘도 아니고. 점점 수치심을 내려놓는 차였다. 무엇보다 김유을은 내가 거적때기를 입어도 그러려니 하는 눈치였다. 매번 화장부터 구두까지 계산한 모습을 보여줬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나를 기가 찬다고 생각할 것이다.
“김유을.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야?”
김유을의 날 선 시선이 나에게 닿았다가 금세 사라졌다. 화가 난 게 누군데 저가 더 화내고 있었다. 그러게 왜 여기서 머슴 노릇을 하고 있담. 꼴 보기 싫은 나까지 꼬박꼬박 보면서.
“할머니가 이제는 그런 것까지 시켜?”
도무지 소통에 관심 없는 고집불통이다. 내가 지고 말았다. 한숨을 등에 얹고 돌아가려던 차였다. 단정한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안 시켜.”
무시할 줄 알았더니 대답까지 해준다. 아주 황송할 지경이었다.
“그럼 왜 해.”
“여기 쓸 때마다 불편하실 테니까.”
누가 보면 나는 계모고 지는 신데렐라다. 요정 할머니는 자기 혼자 모시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혼자 중얼거리는 때였다.
“우야.”
김유을은 한 박자 느리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렇게 부르시던데.”
전구를 들여다보던 김유을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야. 할머니는 가끔 나를 그렇게 부른다. 할머니는 사실 친해진 모든 사람을 그렇게 불렀다. 해경이는 경아. 김유을은 을이.
“할머니 습관이야.”
“우야.”
“왜 그런 걸 따라 해.”
“귀엽잖아.”
그때 김유을이 웃었다. 청바지에 흰색 티셔츠 입고, 우야, 그렇게 속삭이면서. 달음박질하던 심장이 멈추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역할을 했다. 우리의 냉전을 잊은 심장은 눈치가 없었다. 나는 죄 없는 눈알을 굴렸다. 갑자기 소식 없던 웃음을 날리다니. 아주 제멋대로인 놈이었다.
김유을의 시선은 전구에 딱 달라붙어 있었다. 고정된 그의 시선이 짜증 날 때였다.
“우야.”
마려운 강아지처럼 발 동동거리며 기다린 건 아니다. 그런데 그 장난기 가득한 눈이 내게 온 순간, 거짓말처럼 짜증이 떠밀려 내려갔다.
“의자 가져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전구 나간 화장실은 고치긴 해야 하지 않나. 나는 뭉그적거리며 일어나 할머니 화장대 의자를 가져왔다. 살금살금 걸어가 화장실 중앙에 의자를 놓고, 김유을은 가뿐하게 그 위로 올라섰다.
김유을은 전구를 살살 돌렸다. 집중하는 그의 미간이 모인다. 긴소매에 흘러내리는 티셔츠가 동작에 맞추어 흔들렸다. 나도 모르게 관찰하듯 지켜봤다. 그는 어느 순간 툭 빠지는 전구를 잡아, 빈손인 내게 건넸다.
“우야.”
저게 재미가 들렸나 보다.
“안 흔들리게 잡아. 내 다리.”
멀쩡하게 잘 버티고 서 있는 다리를 내가 왜.
삐뚠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나 해서 꼬집듯 잡았다. 김유을은 그러거나 말거나 새 전구를 꺼내서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살살살 돌린다. 달칵, 소리가 났다. 김유을은 손을 떼고, 제 바짓자락을 잡고 있는 나를 내려다봤다.
“내려가다가 굴러떨어지겠는데.”
“네가?”
“손.”
김유을은 천장에 머리가 닿을 정도로 컸다. 그가 미끄러져 떨어질 확률은 없었다. 나를 놀리려는 것을 뻔히 알지만, 어쩐지 맞장구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손바닥을 펴서 그에게 내밀었다.
“야!”
그게 실수였다. 김유을은 곧바로 뛰어내리듯 내려와, 뻗어진 손을 확 끌어당겼다. 화장실에서 꼴사납게 끌려갔다. 뺨이 단단한 무언가에 눌렸다. 허리가 잡히고, 샌들우드 계열의 향수 냄새를 맡았다. 머리 하나 정도 차이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김유을은 웃음이 저 멀리 물러난 얼굴이었다.
“손해우.”
“왜.”
“너, 내가 우습지.”
“뭐?”
“머저리 같지.”
얘가 대낮부터 수수께끼를 하나 싶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무게가 있었다. 나를 머리부터 짓눌러 화장실 밑바닥에 처박을 무게였다. 잘못한 것이 있는 나는 엄지만 해졌다.
힐끔힐끔 훔쳐보던 시선을 완전히 내리깔았다. 허리를 감싸 안은 김유을의 손이 내 턱을 잡았다. 그러곤 들어 올린다.
“이걸 속아?”
쪽. 가볍게 입술과 입술이 부딪쳤다. 상황을 파악 못 하고 끔뻑거리자, 한 번 더 내 입술을 머금는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에게 난생처음 당해보는 장난이었다.
그는 나를 꼭 끌어안더니, 한순간에 미련 없는 듯 팔을 풀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의자를 한쪽 손으로 들어 화장실 문간을 넘어갔다.
벼락 치듯이 갑작스러운 접촉이었다. 나는 홀로 남겨진 화장실에서 입술을 문질러봤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쟤 진짜 김유을 맞아?
뒤로 새 남자 친구를 사귀기라도 한 듯, 부정한 관계를 맺은 기분이었다.
세상에.
* * *
김유을이 전학 오고 나서 얼마 뒤, 우리 학교에 발 빠른 소문 하나가 퍼졌다. 김유을이 한식 명인 김권영 셰프의 아들이란 이야기였다. 알짜배기 땅 부자인 어머니와 대대로 이어진 한정식집을 운영하는 아버지. 이미 티브이로 소개된 적 있는 김유을의 집은 아이들 핸드폰에서 핸드폰으로 퍼진 후였다.
그럼 쟤도 칼 쓰는 건가? 그쪽으로 아예 진로를 틀려나. 아이들은 김유을의 미래를 마음대로 점쳐 보고, 혀에서 뱉는 유희거리로 삼았다. 잠시지만 학교를 가마솥처럼 달군 소식이었다.
나도 김유을의 진로에 대해 비슷한 짐작을 했더랬다. 그러나 김유을이 가업을 잇기로 마음먹은 것은 2년 전이었다. 제대로 칼을 잡은 것도 내가 알기론 그쯤이었다.
“진짜 맛있어.”
할머니는 늦저녁까지 돌아오지 않으셨다. 전화를 걸어도 화투 치느라 바쁘다며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돈 좀 쏠쏠하게 따신 것 같았다. 할머니의 걸걸한 목소리에 흥분이 담겨 있었으니 말이다. 고로 저녁은 나와 김유을 둘이서 해결해야 했다.
김유을은 내게 무엇이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김유을이 시내 초록 마트에 가서 아침마다 장을 봐온단다. 웬만한 것은 다 해줄 수 있다는 눈치였다. 나는 이제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그의 목적이 뭐든지 간에, 이 집에서 쫓아내려다가는 도리어 내가 쫓겨나게 생겼다.
‘비빔밥.’
‘비빔밥?’
‘응. 나물 같은 거 넣어서.’
김유을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걸어가 냉장고를 살폈다. 안 된다는 둥 다른 걸 고르라는 둥 군소리하지 않고서 바로 반찬통을 꺼내기 시작했다.
밥은 밥솥이 맛나게 해주고, 나물은 할머니가 무쳐 놓은 것이 있었다. 김유을이 한 것은 달걀 프라이와 시금치 무친 것밖에 없었다. 고추장도 할머니가 담근 고추장이었다. 참기름도 할머니 깨 밭에서 나온 것이었다.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다.
빨간색 고추장이 숟가락에 짓눌려 밥알에 고루고루 발라진다. 반숙 달걀 프라이를 빨간 양념이 묻은 나물 위에서 깨트려, 고소한 노른자가 사이사이 스며들도록 했다. 다음은 숟가락의 영역이었다. 참기름에 버무려진 시금치와 나물을 잘 섞이게 비벼준다. 빨간 양념 옷 입은 밥알만 그득하면, 그때는 이제 한술 떠도 된다는 뜻이었다.
갓 나와 뜨끈한 밥이었다. 비벼진 밥을 입 안에 넣자마자 침이 고였다. 짭짜름한 고추장 맛을 곧바로 참기름의 고소함이 덮어준다. 어금니에 씹히는 나물은 이를 데 없이 완벽했다. 환상의 조합이었다.
“너 안 먹어?”
내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물어보았다. 김유을은 밥을 다 비벼놓고 뜨는 둥 마는 둥이다. 차려서 제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맛있어. 얼른 먹어.”
그러고 보니 김유을은 놀라울 만도 하다. 내숭은 아니지마는 김유을 앞에선 밥이 안 먹혔다. 영수증 보기 두려운 곳에서 먹는 비싼 밥. 훗날 카드 대금처럼 갚아야 할 것 같았다. 사기꾼이 사기 치기 전에 대접을 받는 기분이었다. 뭘 먹어도 맛이 있질 않아서 체하기 직전에 수저를 놓았더랬다.
“사기꾼도 이런 사기꾼이 없지?”
억지로 쾌활한 척 물었다. 김유을은 제 밥을 휘젓기만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유을아.”
나의 부름에 그가 가만히 있었다.
“달걀 프라이 하나 더 줄까?”
나름 뇌물 겸 사과의 표시였다. 김유을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어처구니없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의 입술이 시원하게 양옆으로 벌려졌다. 그가 숟가락을 놓고 제 얼굴을 쓸었다. 그의 손가락이 미처 가리지 못한 곳으로 미소가 보였다.
나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김유을을 훔쳐보았다. 그는 미소로 가득한 얼굴을 가리려 했다. 쟤는 무표정할 때 누구 하나 죽인 얼굴이었는데 저렇게 웃으니까 싱그러웠다.
김유을은 한참을 숨죽이듯 웃었다. 저녁별이 뜬 청봉리에서 우리 둘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나는 고소한 참기름 묻은 숟가락을 물고, 쟤는 연고 없는 청봉리에서 아픈 놈처럼 웃기나 하고.
그런데 웃음이 전염된 건지 뭔지. 나도 실없이 웃었다. 밥 한술 떠 입에 넣으면서 웃고, 김유을의 허술한 미소를 보며 같이 웃고. 우리 사이에 남아 있던 묘한 불편함을 씻어내는 웃음이었다.
김유을은 이제 밥은 안중에도 없는 듯 팔을 베고 앉아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의 앞에서 먹는 모습이나 기분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다. 허한 속이 채워질 때까지 마음껏 먹었다.
“손해우.”
“응.”
“왜 비빔밥이야, 하고 많은 것 중에.”
비빔밥 싫어하는 한국 사람 거의 없다며, 심드렁하니 대답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과하게 좋았다. 나는 그에게 진솔한 대답을 했다.
“엄마가 요리를 진짜 못 하셨거든.”
나는 마지막 한 술 남은 비빔밥을 싹싹 긁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게 비빔밥이라. 할머니가 보내온 반찬 이렇게 때려넣고 비벼서, 엄마가 엄청 맛있는 거라면서 줬어.”
김유을은 으레 다른 사람처럼 추임새를 넣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 입술만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머리 커서는 할머니가 한 요리나 다름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뭐. 나는 좋았어. 우리 엄마, 내가 맛있다고 한 움큼씩 퍼먹으면 좋아했거든.”
“…….”
“여기 오니까 괜히 생각나서. 할머니 나물도 있고, 만들어줄 사람도 있고. 이상하게 내가 해 먹으면 그 맛이 안 나.”
가만히 듣고 있던 김유을이 내게 물었다.
“오늘은 어떤데.”
“맛있냐고 묻는 거야?”
“어.”
“싹 비운 거 봐라. 두 그릇도 가능한데 살찔까 봐.”
내가 아무리 능청을 떨어도 김유을은 아까만큼 웃지 않았다. 내 얘기를 고해성사처럼 들은 것 같았다. 날 바라보는 눈빛이 괴로운 기색을 띠었다. 정작 나는 무덤덤한 얘기를 자신이 더 아파하고 있었다. 제가 고달픈 손해우라도 된 것처럼 어두웠다.
“비빔밥 얘기는 여기서 그만하고.”
하나씩 주고받자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나만 종달새처럼 떠드는 건 불공평했다.
“고등학교 때, 언제 알았어? 우리 부모님 돌아가신 거.”
김유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전학 오고 한 달 뒤.”
“전학 오고 한 달?”
더 말이 되질 않았다. 내가 알기로 김유을은 졸업할 때까지 말 한번 주고받은 아이가 없었다. 몰래 내 비밀을 캐낸 친구에게서 들었거나, 아니면 담임이 은근슬쩍 흘렸거나. 그 두 가지 가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가 팔짱 끼고 있던 팔을 풀었다. 팔을 뒤로 넘기고, 다리는 쭉 편다. 그의 발끝이 내 정강이에 닿았다.
“네가 네 입으로 말하는 걸 들었어.”
“언제.”
“10월 모의고사였나. 아마 그즈음.”
내가 내 입으로 말하는 걸 들었다. 10월 모의고사. 내 입. 10월 모의고사. 번갈아 말하다 보니까 한 가닥으로 좁혀진다. 그가 어느 때를 얘기하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그 담배꽁초가 버려진 골목길에서…….
10월 모의고사는 수능 전 마지막 모의고사였다. 다른 반 반장은 매 모의고사에 떡이나 샌드위치를 돌리는데, 왜 우리 반 반장은 집도 잘산다면서 음료 한 번 사오지를 않느냐고 누군가 물었다.
시작은 유달리 고약한 한 명뿐이었다. 그러나 10월 모의고사가 가까워져 오자 반 이상이 떼를 썼다. 할머니가 보내주는 생활비는 다 썼고,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하고 싶어도 써주는 사람이 없었다.
멀쩡히 하교를 하던 중에 구역질이 났다. 압박감이 내 어깨를 마구 눌렀다. 걷다가 아무 골목길에나 뛰어들어 갔다. 핸드폰을 들고 수백 번을 고민했다. 할머니한테 전화해서 샌드위치를 사달라고 하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먼젓번 통화에서 갑작스러운 장마로 깨 농사가 어렵다고 했다. 다른 집 농사일을 도와주며 생활비를 맞추어주었다고도 했다. 그 말에 망설였지만, 이윽고 철없는 이기심으로 한번 말은 해보자 싶었다.
‘할머니.’
‘왜.’
예상대로 친절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고된 농사일에 지친 목소리였다. 할머니는 일이 바쁘니까 얼른 용건만 말하라고 했다.
‘나 학교에서 반장인데. 곧 시험이라. 고삼이거든. 응. 그래서 반장이면 샌드위치 같은 거라도 사줘야 한다고 해서……. 내가 빵집 사장님한테 말해볼 테니까. 다음 달 생활비에서 오만 원이라도 먼저 주면 안 돼요?’
할머니는 네 사정이 그런데 애들이 뭘 그런 것까지 바라냐고 물어왔다.
‘애들…… 나 엄마아빠 없는 거 몰라서.’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통화는 이렇다 할 말도 없이 끊어졌고, 나는 그 담배꽁초 쌓인 골목길에 쭈그리고 앉아 엉엉 울었다. 목이 쉬어서 찜질을 해야 할 정도의 통곡이었다.
차라리 이참에 애들한테 솔직하게 말을 할까 했는데. 할머니가 다음 날 거짓말처럼 오만 원을 보내주셨다. 철없는 마음에 기뻤다. 이걸로 단골 빵집 사장님한테 선금으로 내고, 나머지는 다음 달 생활비에서 깔 생각이었다.
‘자. 이거 해우가 너희 힘내라고 사온 거니까. 한 분단씩 줄 서서 나와서 가져가고. 주스는 오렌지랑 포도 중에 알아서 골라 가는데…….’
그런데 오후 수업쯤에 내 이름으로 햄버거가 배달됐다. 그것도 유명 수제 햄버거 가게였다. 신선한 양상추와 두툼한 패티가 들어간 햄버거가 먹음직스러웠다. 세트라며 주어진 감자튀김은 또 어떻고. 아이들은 신이 나서 나한테 고맙다고 말했다. 정작 어리둥절한 나는 뺨을 꼬집어봤었다.
학교가 끝마치자마자 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아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꾼 돈이니까 다음 달 생활비에서 안 까도 된다는 말만 했다. 전혀 햄버거에 대해 모르는 눈치셨다. 그게 다였다. 아무리 봐도 평생 햄버거 한 번 안 잡쉈을 우리 할머니가 준비한 게 아니었다. 설마 그 아는 사람이라는 분이 도와주신 건가 했다. 하도 내 사정이 딱하니까.
그런데 오늘 보니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유을은 그날 내 통화를 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때부터 너는 내가 퍽 불쌍했겠다. 그래서 내가 꺼낸 엄마 얘기에 아파했구나.
“그 햄버거. 네가 사준 거야?”
김유을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내리뜨고 내 표정을 살폈다. 내가 좋아하는 건지 화를 내는 건지. 그걸 샅샅이 알아보고 있는 눈이었다.
“싫어?”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김유을은 나지막이 그렇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나를 동정했든, 가련한 거짓말쟁이를 도와줬든. 그날 나는 진심으로 이름 모를 그분에게 감사했다. 열심히 살면 하늘이 굽어살피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할머니를 통해서라도 그분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고마워.”
치미는 눈물을 참았다. 또 울면 쟤는 참 시도 때도 없이 우는구나, 할 것 아닌가. 나는 눈물 대신 웃었다.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맥주 마실래.”
비빔밥 먹고 맥주. 완벽하게 살찌는 탄수화물 코스지만, 내가 울적할 때 내 눈물을 얼마 정도 덜어가는 코스이기도 했다.
* * *
그날 할머니는 막걸리를 마셔서 오토바이를 타지 못하며, 내일도 집으로 올까 말까 한다고 전했다. 나는 그때 김유을의 차를 타고 편의점 찾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외박 소식은 뒤늦게야 ‘아, 할머니 오늘 못 들어오신대’라고 다시 한번 되짚을 수 있었다.
산이 굽이굽이 깊은 청봉리 근처는 오후 8시면 편의점이 다 닫았다. 근처 대학이 있는 곳까지 나와서야 반짝반짝한 편의점 하나를 찾아냈다.
알 감자칩 한 봉, 핫바 하나, 버터 오징어 하나, 내 입맛에 맞는 매콤한 과자 한 개. 소주는 세 병, 맥주는 무려 일곱 캔을 샀다. 계산을 마치고 담는데 종량제 봉투도 모자를 성싶었다. 차를 끌고 나온 게 다행이었다.
다시 안락한 청봉리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오랜 기간 서로를 겉으로 ‘알기만’ 한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쟤 이름은 김유을이고, 올해 나이는 몇 살이고, 하려는 일은 뭐고, 그런 데면데면한 남도 알 법한 것들.
편의점에서 안줏거리를 잔뜩 사들고 와서 먹는, 그저 그런 평범한 데이트도 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는 술 한 잔을 마셔도 와인 바 같은 곳을 가곤 했다. 정작 와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면서 말이다.
김유을의 취향은 소주고, 나는 맥주였다. 그걸 편의점에 와서야 알았다. 고르면서 나눈 대화로 술 취향 정도는 파악한 것이다. 이러고 보면 사귄 기간은 쓸데없었다. 햇수보다 상대방과 무엇을 경험했느냐가 중요했다. 하다 하다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기분이지 않은가.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본채의 불을 끄고, 꾸벅꾸벅 조는 솔이에게 간식을 주었다. 솔이가 제집으로 들어가 잠이 들자 우리는 툇마루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김유을의 패딩을 이불처럼 덮었고, 김유을은 다른 점퍼를 입었다. 굳이 추운 밖에 나와 술을 마시는 것은, 술자리 분위기보다 하늘에 뜬 별 때문이었다.
차를 타고 오는 내내 머리 위에 별이 총총 박혀 있었다. 도시에서 살다 보면 떠도는 별 하나에도 감탄하곤 한다. 마음 달래줄 맥주를 마시면서 구경하고 싶었다. 이참에 별구경 한번 기똥차게 해보자는 거였다. 내가 먼저 바깥에 앉았고, 김유을도 흔쾌히 동의한 일이었다. 마루 가운데에 안주를 깐 뒤 맥주 한 캔씩을 들었다.
“예쁘다.”
청봉리도 평상시에는 별이 열 개는 보일까 말까 한다. 오늘은 하늘이 깨끗한 덕에 유독 반짝이는 것이었다. 나는 겨울바람에 언 듯한 맥주를 입술에 대고 홀짝거렸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시원한 맛이 난다. 다른 건 전부 한국인 입맛인 내가 유일하게 외도하는 게 이 맥주였다.
“유을아.”
조용히 맥주를 마시고 있던 김유을이 흘깃 보았다. 나는 뜯어낸 오징어 다리를 그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뭐 하나 말해주면 이거 줄게.”
“하.”
그가 맥주 캔을 입에서 떼어내며 웃었다. 김유을이 은근히 이런 거에 약하다는 걸 알아낸 후였다.
“너 할머니랑 언제 만났어?”
이것이 보면 나 못지않게 까면 깔수록 나오는 양파였다. 사실 김유을이 내 몸에 도청 장치나 위치 추적기 같은 것을 단 건 아닌지 의심했었다. 워낙 여기저기 미친놈들이 설치고 다니는지라 의심이 안 들 수 없지 않은가.
그나마 김유을은 밝히지 못할 사연이 있는 것 같았다. 나를 못 본 척 눈감아준 사연, 전부터 할머니를 알게 된 사연, 여기에 계속 붙어사는 사연. 나는 과거에 가려진 그 사연이 궁금했다.
“비밀.”
그렇게 말하고는 눈앞의 오징어를 입술로 물어간다. 눈 뜨고 코 베인 기분이었다.
“말은 해주고 가져가야지.”
“말했는데, 비밀이라고.”
“진짜 수상하네. 이게 말이 돼? 청봉리에 일하러 왔다가 만난 것도 아닐 테고.”
무슨 상상을 하는지 김유을이 장난스럽게 눈을 휘었다.
“아닐까?”
“정말 여기에 일하러 왔었어?”
갈수록 수수께끼인데 김유을의 미소는 짙어져만 갔다. 얘가 원래 이렇게 장난치기 좋아하는 애였구나. 놀리는 맛을 본 후부터는 툭하면 장난이었다. 나는 힘 빠진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때렸다.
“그럼, 나한테 위치추적기 달았지?”
“달고 싶네.”
“사람 시켜서 뒷조사는?”
“해보려고, 조만간.”
요리조리 말을 던져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김유을은 엷은 웃음이 번진 입가로 맥주 캔을 가져갔다. 그의 목울대가 시원스레 움직이는 게 보였다. 변태처럼 눌러보고 싶다는 욕구가 간질간질했다. 김유을은 그런 내 시선을 영 모르는지, 빈 것 같은 맥주 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더 없어?”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야 질문도 할 맛이 나는 거야. 없어.”
“그럼 내가 할까.”
“해봐.”
나는 어디 해보라는 듯 맥주 캔을 구겼다. 속속들이 밝혀진 마당에 거리낄 것 없었다. 사실 이 자리도 더는 숨길 게 없다는 걸 증명하는 자리였다. 무엇을 물어봐도 대답해 주리라 생각했다. 김유을도 그간 답답했을 테니까.
“나 사랑해?”
그러나 이런 식의 질문은 크나큰 반칙이었다. 나는 그의 패딩을 구김지게 말아 쥐고 말았다. 김유을의 눈은 한시도 나를 피하지 않았다. 진실로 묻고 있었다. 내게 자백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을 요구한다. 그의 눈은 나를 그 갈색 바다에 빠트리고, 나올 수 없도록 출구를 닫아버렸다. 나는 허우적거린다. 유들유들하게 넘기지 못하고 입만 뻐금거렸다.
“손해우.”
김유을은 다시 맥주 캔을 들었다. 두말할 것 없다는 듯, 비웃음 아닌 비웃음이 빠르게 얼굴을 스쳤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맥주 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내가 왜 너한테 고백했는지 알아?”
피치 못한 이유라도 있는 듯한 투였다. 나는 조그맣게 ‘아니’라고 말했다. 항시 그 고백은 물음표로 마친 수수께끼였다. 자기 전에 문득 그의 고백을 떠올리곤 하면 가슴께가 답답했다. 사귀는 내내 어영부영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을 것이다.
“너한테 차이려고.”
“차여?”
“넌 나 안 좋아하니까. 차이고 나서, 감정은 깨끗이 없어지길 빌었어.”
그는 말이 끝나자마자 갈증 나듯 맥주를 머금었다. 느릿하게 삼키고, 다시 입을 연다. 그의 목소리는 쇠꼬챙이 끝처럼 날카로웠다. 들어본 것 중 가장 솔직한 목소리였다.
“그런데 네가 좋다고 해서…… 얘도 나를 신경 쓰고 있었나. 나를 좋아하나. 내가 좋은 건가. 내 어디가 좋은 걸까. 얘도 나랑 입 맞추고 싶을까. 혼자 밤을 새웠어, 그 생각으로.”
김유을은 다 마신 빈 캔을 제 옆자리에 놓았다. 그의 눈이 나에게 박혔다. 내 심장을 무두질하고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왜 받아줬어. 차라리 몇 년 혼자 애새끼처럼 삽질하게 내버려두지.”
“…….”
“그럼 적어도 널 사랑하진 않았을 텐데.”
나는 그의 살 내음이 밴 패딩에 둘러싸여, 고백 아닌 고백에 두드려 맞고 있었다. 빙글빙글 어지러웠다. 대답할 말을 고르고 골랐다. 섣부르게 끼어들면 흐름을 깰 것 같았다.
“유을아.”
“이 상황에 그딴 식으로 부르지 좀 마.”
“날 사랑해서 눈감아준 거야? 내가 거짓말하는 거. 너한테 말 안 하는 거.”
그때 김유을이 상체를 기울였다. 중간에 놓인 안주는 그의 손아래에서 망가졌다. 그의 얼굴이 내게 닿을 듯 가까웠다.
“내가 사실대로 말하면.”
“…….”
“너 도망쳤을 거잖아, 지금처럼.”
코웃음 나도록 맞는 말이었다. 나는 김유을의 말대로 꼭꼭 숨었을 것이다. 빳빳이 얼굴 들고 다니기 수치스러워서. 너한테 내가 애인이 아닌, 동정해야 하는 대상인 게 창피해서.
“손해우, 네 잘못은. 날 속인 게 아니라.”
“…….”
“날 기대하게 한 거야.”
그는 산산이 부서진 모래성 같은 자신을 드러냈다. 가까이서, 그의 말간 눈이 보일 거리에서. 지금껏 차곡차곡 쌓아둔 상처를 꺼내 보였다.
“졸업한 학교 이름만 나와도 표정을 굳히는 네가, 나는 남자 친구라는 이름으로 내버려두는 거. 이따금 진짜 나를 걱정해 주는 것처럼 만져 주는 거. 예쁘게 웃어주는 거. 유을아, 해주는 거. 다.”
그의 손이 내 뺨에 얹어졌다. 제때 떠나지 못한 늦겨울처럼 차갑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의 손이 내 뺨을 앞쪽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러운 손이 간절한 듯 떨고 있었다. 우리의 입술이 겹칠락 말락 한 그 순간. 나는 봉사가 눈을 뜬 듯 제대로 보고 말았다. 김유을의 눈이 내 뺨부터 입술, 눈까지 차례차례 걸쳐 훑는다. 조른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는 한 조각의 애정을 갈망하고 있었다.
우리가 왜 사귀는지 모르겠다고 종종 생각했다. 여느 연인처럼 불타오르지 못하고, 사소한 걸로 다퉈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서로의 든든한 위안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나는 오늘에서야 그를 본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침묵을 곁에 둔 남자를, 수없이 많은 말을 삼키고 소화했을 남자를, 차마 소화 못 한 가시가 무수히 박힌 남자 친구를. 나는 거짓일지라도 그보다 한발 앞서가고 싶었다. 솔직해진다는 건, 그의 뒤로 물러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기 싫은 마음에, 그 자존심에 못나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그는 덜 자란 나의 앞에서 사랑을 말한다. 비겁하고 용기 없는 내게 입을 맞춘다. 나를 바라고, 내 사랑을 바란다. 나는 선뜻 다가온 그의 입술을 삼켰다. 부드럽게 놓아주고, 다시 내 입술을 묻었다. 그 짧은 입맞춤에 그의 가시가 녹길 바랐다.
“유을아.”
더 말해줘.
“계속 알려줘.”
예전에 너는 나처럼 어려운 마음이었는지, 나를 어떤 시선으로 해석했는지, 나는 너에게 얼마만큼 유일한 사람이었는지, 지금의 나는 너에게 의미가 있는지를.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었다. 동생은 낯간지러워하고, 할머니는 어릴 때도 해준 적이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그러한가.
가슴이 벅차서 죽을 것 같았다.
* * *
내 첫 경험은 김유을이었다. 김유을도 아마 나일 것이다. 고등학교 삼학년 이전에 경험이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십중팔구로 확신한다. 김유을도 내가 처음이었다. 우리는 첫 경험을 하고 첫 키스를 했다. 그만큼 어색하고 어설플 수 없었다. 비에 홀딱 젖어 한 호텔에 묵게 된 날이었다. 원수지간처럼 떨어져 있다가 김유을이 먼저 씻고, 그다음에 내가 씻었다. 호텔 보디 워시의 향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뜨신 물에 언 몸을 녹이며 잠깐 졸기까지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우리가 하기는 하게 될까, 같은 의심이 있었다.
거스를 수 없는 분위기란 게 있다. 같은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져 자더라도, 한번 손끝이라도 스치면 서로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김유을이 먼저 내 손에 깍지를 꼈고, 나 또한 김유을의 손을 마주 잡았다. 멀미가 날 만큼 무척 떨렸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야말로 공부만 하느라 인생 헛산 범생이었다. 그 흔한 야한 동영상도 본 적이 없었다. 지식이 없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김유을도 이론은 아는 듯한데, 내가 아파하는 기색을 보이자 금방 멈췄다. 아파하면 멈추고, 아파하면 멈추고. 결국 몇 시간을 끙끙거리다가 입술을 나누는 것으로 그 밤을 대신했다.
그 이후로도 몇 번. 좋아질 것 같은 기미를 보이면 김유을이 멈추고, 느낌이 긴가민가하다 싶을 때 김유을이 멈추고. 여하튼 김유을은 그랬다. 나는 남녀의 잠자리라는 게 생각보다 호들갑스럽지 않다고 여겼다. 다들 죽고 못 산다고 난리 칠 정도로 김유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하아…….”
그런데 오늘은 술기운에 덤벼서 그러한가. 김유을이 혀를 깊게 넣은 다음 입술을 빠는데, 저절로 헐떡거리며 그의 목을 감았다. 입술을 비비대고, 끈적거리게 입 안을 탐하고, 허겁지겁 상대의 옷을 벗긴다. 김유을은 니트를 벗는 그 잠시를 견디지 못했다. 내 뺨이 닳도록 키스를 퍼부었다.
예전부터 잠자리는 몰라도 입맞춤은 꽤나 달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이건, 꽤나 정도가 아니었다. 나에 대한 지휘를 맡기는 기분이었다. 나를 마음대로 해달라고 하고픈 기분이었다. 입술이 연유 부은 크림처럼 부드럽다. 종일 맛보고 싶었다.
“하, 유을아…….”
이 살갗이 오그라드는 감각을 김유을도 느끼고 있을까? 나는 그의 목에 감은 팔을 풀지 않고서, 서서히 다가가 입술을 문질렀다.
“어떻게 하면 좋겠어?”
그가 자신에게 달라붙은 내 허리를 붙들었다. 붙들고 살짝 밀었다. 나와 눈을 맞추고 묻는 듯했다. 대관절 무슨 소리냐고.
“너도 좋게 해주고 싶어.”
“좋게?”
“그런 거 있잖아……. 자세라든가, 아니면…… 어딜 만져 줬으면 좋겠다든가.”
이게 술의 힘이라면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창피한 나머지 그의 어깨에 얼굴을 숨듯이 눌렀다. 그래도 엔간한 것은 들어주고 싶었다. 그는 내 용기를 못 알아먹은 듯 차가웠다.
“없어, 그런 거.”
“왜?”
은근히 섭섭한 것이 아니라 대놓고 섭섭해지려고 했다. 안달하듯이 나를 사랑한다고 했으면서, 막상 사랑하는 사람이 만져 줬으면 싶은 곳이 왜 없느냔 말이다. 나는 장난스럽게 그의 귓불을 깨물었다.
“말해. 안 그러면 다 물어뜯어.”
그가 약간 키득거리더니 한숨을 길게 내쉰다. 무엇이 문제기에 뜸을 이다지도 들이는 것일까. 우리가 다른 연인처럼 화끈한 밤을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기분 거시기한 밤 정도는 보내고 싶었다.
“유을아.”
“말하면.”
“아!”
김유을의 손이 내 허리를 들었다. 제 어깨에서 까부는 나를 잡아다가 허벅다리 위에 제대로 앉힌다. 나는 그를 올라타고 앉은 자세가 약간 민망스러웠다. 엉덩이를 뒤로 쭈욱 뺐다. 그러자 그가 다시 앞으로 내 양팔을 끌어당긴다. 그의 청바지와 내 바지가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넌 말해도 못 들어줘.”
“뭐…… 때리게?”
“뭐?”
“그거 아니면 못 들어줄 게 뭐 있어.”
하. 그가 뱉은 찬웃음 소리가 내 이마에 닿았다. 나는 망설이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가운뎃손가락으로 그의 어깨를 살금살금 돌아다녔다.
“너 좋아하는 걸 한 번도 못 봐서…….”
그가 제 어깨에 돌아다니는 손가락을 빤히 바라본다. 집중하는 시선이 저릿저릿한 지경이었다. 이렇게 탐하면서, 매양 번뜩이는 눈을 보내면서. 목전에 두고 침만 꼴깍꼴깍, 아껴먹는 것일까.
아까 전, 키스할 때 보였던 눈을 원했다. 나를 원한다고 외쳐대는 눈빛을 또 한 번 보고 싶었다. 나에 대한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는 눈빛. 그 눈빛을 한 몸에 받았을 때의 벅참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다.
가운뎃손가락에 이어 검지까지 동원했다. 밤도둑처럼 그의 가슴께를 돌아다니자, 김유을은 졌다는 눈으로 내 허리를 안았다. 무언가 시작하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했지만 김유을은 나를 이불 위에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일어선다. 어딜 가냐고 물으려던 차였다. 그는 성큼 걸어가 문을 잠갔다.
“문은 왜 잠그는데?”
그렇다. 할머니가 혹시 들어오면 안 되니까. 나는 납득할 만한 이유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한옥에 있는 내 방이지만, 혹시 할머니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내 앞으로 다시 온 김유을은 전혀 다른 소리를 했다.
“너 중간에 나간다고 할까 봐.”
나는 웃고 말았다. 중간에 내가 발가벗고 나가기라도 할까 봐? 농담조처럼 던졌지만 김유을은 냉담하게 웃었다.
“응.”
그쯤 되니 살짝 불안했다.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사실상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손에 꼽았다. 김유을이 원하는 거는 열심히 할 텐데, 너무 심한 요구는…….
“뭐 하려…….”
김유을이 덮칠 듯 다가와 천천히 이불 위로 누웠다. 나는 그의 상반신에 갇힌 채였다. 그는 키스할 것처럼 내 입술 위에 제 입술을 올려놨다. 그의 눈이 성난 악귀처럼 웃고 있었다. 어쩐지 움츠러들게 되었다.
“뭐 하려고.”
내려간 그의 손이 내 바지 버클을 푼다. 한 손으로 손쉽게 통이 넓은 바지를 벗겨낸다. 종아리를 타고 내려가는 그의 손등이 느껴졌다. 그는 반팔 티셔츠까지 입고, 나는 속옷만 남겨두고 있었다. 내가 시선을 피하려고 하자 그의 입술이 내 입술을 누른다. 맛 떨어지게 도망치지 말라는 경고였다.
배꼽부터 뱀처럼 스르르 내려간 손이 내 팬티에 닿았다. 이건 예전부터 자주 하던 것이었다. 팬티 위에서 그가 손가락으로 놀듯이 흥분시키고, 내가 이쯤 하라고 말하면 곧바로 손을 뗐다. 이번에도 비슷하려니 싶었다.
“하…….”
그가 내 목덜미를 살며시 깨문다. 동시에 손가락으로 팬티 위를 지그시 눌렀다. 열이 오른다. 야릇한 기분이었다. 그의 중지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내 팬티 위를 노닌다. 음부와 손가락을 가운데에 둔 천이 민망하게 젖어들기 전이었다. 나는 그 전에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의 손가락이 축축한 것은 왠지 보기에 거북하다.
예전보다 공들여서 손가락을 움직인다. 팬티 위에서 두드러지게 갈라진 부분을 일부러 왔다 갔다 하질 않나, 은근히 손가락으로 속살을 찔러보질 않나. 움푹 들어간 그의 손가락 끝이 까닥거릴 때 나는 노상 그렇듯 그만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두어 번 두드리는 것이다.
“아, 유을아……!”
그는 멈추지 않는다. 오히려 손가락으로 팬티를 젖히고, 그 젖혀진 부분으로 손가락을 넣는다. 여린 살이었다. 낯선 손가락이 들어오자마자 홧홧한 감각이 느껴진다. 손가락 끝이 살짝 들어갔을 뿐이었다. 나는 김유을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
김유을은 침묵을 무기로 쓴다. 다만 여기서 그만둬야 하는지 눈으로 물었다. 입술은 일자로 다물려 있지만, 곧 터지기 일보 직전인 걸 알겠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잡은 손힘을 덜었다.
그는 곧장 손가락 하나를 더 넣었다. 그 낯선 느낌에 내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감자마자 김유을이 내 귓가에서 키득거렸다. 간악한 속삭임이었다.
“눈 떠봐.”
왜 그런가 싶어 살짝 눈을 떠 보았다. 그 순간에, 내가 저를 믿고 눈을 뜬 순간에. 김유을은 손가락 하나를 푸욱 더 찔러 넣었다.
“아!”
김유을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을 꽉 줬다. 나도 모르는 일이었다. 놀라서 커진 눈에 그의 황홀한 미소가 잡혔다. 겁이 확 들었다. 얘, 술 마셨더니 맛 간 거 아니야.
“하, 아…….”
들어간 세 개의 손가락이 천천히 속살을 헤집고 쓰다듬는다. 나는 간지러워서 허리를 뒤틀 수밖에 없었다.
“유을아. 거긴, 하으……지 마.”
유난히 못 참겠는 곳이 있었다. 다른 데는 입술을 꽉 깨물면 견딜 수 있지만, 왼쪽에 조금 깊숙한 곳에 있는 곳. 김유을의 손가락이 스치면 신음이 절로 나왔다. 나도 모르게 밑에 힘을 주고, 입술을 물게 되는 곳.
“어디.”
그걸 김유을한테 순순히 일러두는 게 아니었다. 그는 복기하듯이 되짚고 올라갔다. 조금 더 빠르다. 아까 지나갔던 자리를 더 깊게 파내면서 묻는다.
“여기지.”
“하, 잠깐, 유을아.”
“왜, 좋잖아.”
그의 목소리가 낮게 잠겼다. 그는 이제 내 옆에 누워, 한 손으로 내 양팔을 붙잡았다. 자꾸 자신의 어깨를 밀어내는 게 거슬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낯선 감각이 불편해서, 죽도록 불편하니까 밀어내는 거였다.
“하아……으, 아.”
미치고 팔짝 뛰겠다. 잡힌 팔을 빼내려고 애써도 그는 놔주지 않는다. 깊숙이 박은 손가락을 빼려고 할 때마다 그의 손가락에 묻은 게 보였다. 김유을이 손가락을 다시 집어넣고, 내가 싫어하는 곳만 툭툭 건드린다. 내가 다리를 오므리려고 할 때였다. 그가 자신의 다리에 내 다리 하나를 끼웠다.
“잠깐, 유을아……. 아!”
빼지 않고서 그 안에서 손을 흔든다. 양옆을 오가고,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인다. 가장 예민하게 튀어나와 있는 돌기는 팬티 위에서 엄지로 문질렀다. 나는 유일하게 자유로운 한쪽 다리를 굽혔다가 폈다. 도망칠 듯 난동을 피웠다. 보기보다 과했다. 감당하기 싫었다. 그의 손을 적시도록 흘려대는 내 음부가 창피했다. 툭, 그가 또 찌르고 꾸욱 누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하, 아, 유을아……. 유을!”
내가 자유로운 왼발로 바닥을 긁기 시작하자, 그가 손가락을 더욱 능숙하게 움직였다. 툭 불거진 돌기는 그의 엄지 아래서 희롱당하고 있었고, 그의 검지는 팬티를 젖히며, 나머지 셋은 열렬히 내 음부 안을 휘젓는 중이었다. 그의 손이 축축하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나는 그에게 붙들린 양손을 마구 흔들었다.
“유을아, 아…… 아!”
의식 없이 꽉 조이고 말았다. 눈을 질끈 감고, 고여 있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새하얗게 머리가 비워졌다. 그의 손가락을 꼬옥 품은 채 허리를 가늘게 떨었다. 그 와중에도 김유을은 팬티에 가려진 내 돌기를 괴롭히는 중이었다. 천천히 엄지로 원을 그리며 눌러준다.
“하지, 하지 마.”
“내가 하고 싶은 거.”
“아, 아으!”
“너 정신없이 우는 거 보고 싶어.”
손가락은 다시 움직였다. 마치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정신없이 울지는 못해도 고여 있던 눈물은 죄 떨어트리는 중이었다. 그는 그런 내가 기꺼운 듯했다. 혀를 날름거리며 그걸 훔쳐 먹었다. 미친 새끼가 따로 없었다.
“아, 유을, 아……!”
더 짧아졌다. 이번에는 허리를 떠는 정도가 아니었다. 나는 온몸을 그에게서 떨어트리고자 발버둥 쳤다. 하나 그의 다리에 붙잡힌 내 왼발이나, 양손이나. 옴짝달싹 못 하고 오히려 그에게 질질 끌려간다.
“엉엉 울면서 매달리는 것도 보고 싶어.”
“미친 새……. 아, 유을아…….”
그는 가뿐하게 나를 제 가슴팍에 끌고 왔다. 끝내고 싶어? 그가 물었다.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김유을이 기회를 주듯 말했다.
“내 목에 팔 감아봐.”
그가 내 양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빠르게 그의 목을 휘감았다. 아직까지 내 음부에 당연하듯 박혀 있는 손가락이 싫었다.
“이번 한 번만, 네 손 놓지만 않으면 돼.”
그는 한쪽 팔로 나를 감싸 안았다. 잠시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그 허전함에 나는 잘게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관문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팬티를 아예 끌어 내린다. 맨살이 드러나자 그는 둔덕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미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곳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가 부드럽게 벌어진 사이로 손가락을 끼우고 움직인다. 축축한 음부를 조심스레 가르고 들어간다. 그러나 손가락이 네 개였다. 한꺼번에 네 개가 들어온다.
“아……!”
이미 진절머리나도록 겪었다. 저 손가락들이 들어와서 얼마나 속살을 못살게 구는지를. 그러나 나는 손을 풀지도 못했다. 그에게 착 달라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풀면 안 돼. 떨어지지 마. 그 경고는 그냥 말로 끝낼 경고가 아니었다.
피해보려고 둔부를 들썩여본다. 그러나 도리어 자극하는 꼴이었다. 그가 멀어진 만큼 손가락을 더 강하게 찔러 넣었다. 손끝으로 살금살금 긁는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 거기서 참았어야 했다. 그러나 쑤욱 손가락이 긁어 내려가는 움직임이었다. 못 참고 그의 어깨를 밀었다.
“아, 유을아…….”
의외로 그는 젖은 손가락을 미련 없이 빼냈다. 내 뺨에 봐주듯이 입을 맞췄다.
“괜찮아.”
내 손목을 잡아간다. 제 벨트가 풀린 곳, 그 아래에 튀어나온 부분에 내 손을 문지른다. 내 손을 이용해 드로어즈를 끌어 내렸다. 여태껏 한 번도 내 손으로 그의 성기를 만져본 적은 없었다. 어디를 만져야 할지 헤매던 손이었다. 끌어다가 핏줄이 굵게 돋아난 성기 위에 올려뒀다.
“아……. 좋아, 해우야.”
혼자 자위할 때랑 비교가 안 되는데. 그가 내 귓가에 사근사근 속삭였다. 김유을은 콧날을 내 뺨에 비비적거렸다. 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귓불을 살짝 머금는다. 점점 갈수록 노골적이다. 내 손을 제 손처럼 쥐락펴락하며, 아예 두툼한 것을 꽉 쥐어보게 만들었다.
“해우야…….”
“왜 그렇게 불러, 자꾸.”
“하고 싶으니까, 그렇지, 씨발…….”
그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해우야. 내 어깨에 제 코를 묻고, 내 손을 빠르게 움직이도록 만든다. 위에서 아래. 위를 잡고 조금 흔들다가 다시 아래로. 아예 내 손에 깍지를 끼우고 아래에서 위로 쭈욱 잡아 올렸다. 그의 성기는 제법 큰 정도가 아니었다. 이러니 맨날 들어오다가 말고, 내가 아프다며 난리를 피웠지 싶다.
김유을은 내 입술을 집요하게 봤다. 내 손을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보통 음탕한 게 아닌 소리가 났다. 내 손이 흉측한 그의 것을 쓸어 올리고 만지고. 그는 내 안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헐떡였다. 하염없이 내 입술을 찾았다.
입술. 키스해 줘. 나는 그의 뺨부터 찬찬하게 입술을 맞댄 뒤, 조금씩 옮겨가 입술을 머금었다. 그는 기다린 듯 내 혀를 잡아채 끈끈하게 엮고 휘감았다. 조금도 열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한 과거의 나를 후려치고 싶었다.
술기운인지 뭔지 모르겠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정신없이 혀를 섞었다. 내 손에 싸지르는 하얀 씨물을 보고 눈감았다. 이제는 맹추처럼 김유을이 무뚝뚝하다고 생각할 수도, 그의 더운 마음을 모른 척할 수도 없다. 그는 참아왔고, 참고, 또 참았을 뿐이었다.
입맞춤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유을의 어깨를 슬쩍슬쩍 밀어냈으나 그는 그럴수록 몸을 치댈 뿐이었다. 그의 콧날이 계속 내 뺨에 잇따라 문질러진다. 내 입술을 한껏 빨았다가 놓아주는 사이, 서로의 밑은 다시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머릿속에 새빨간 신호등이 켜진 것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 간절히 누군가를 원해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김유을이 살짝 눈을 뜨고 나를 샅샅이 살펴본다. 내 붉어진 뺨과 눈가, 그리고 젖은 아래를 차례로 확인한다. 부끄럽지만 참았다. 김유을의 손이 다시 갈고리처럼 음부를 헤집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은 손에 힘주고서 매달릴 즈음, 김유을이 내 귓가에 말을 숨처럼 쏟아냈다.
“욕을 해, 차라리.”
뭐? 나는 잘 못 들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보다 그의 손가락이 어디를 쑤시고 있는지가 내게 선명히 다가온 까닭이었다. 결국 내가 놀라서 그의 어깨를 밀치기 전에 두툼한 무언가가 툭 닿았다. 살짝궁 비벼진다. 내 음부 위에서 부드럽게 노는 그것을 느끼다가 놀라고 말았다.
“아…….”
사실 입에서 비명이 나올 뻔했는데, 그러기에는 김유을의 표정도 그다지 아름답지 못했다. 김유을은 연신 내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내 목에 입술을 비비면서도 눈으로는 나를 확인하듯 한다. 들어가도 돼? 들어갈까? 그 눈이 그렇게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동의한다는 의미보다 그의 긴장을 풀어주고 싶었다. 이마에 부드러이 입을 맞췄다. 그게 도화선이 될 줄, 김유을이 돌변할 줄은 몰랐었다.
“아! 잠깐, 유을…….”
끄트머리만 들어왔을 뿐인데 압박감이 남달랐다. 김유을은 항의하지 못하게 아예 입술을 틀어막아 버렸다. 그의 혀가 내 입 안을 거칠게 헤집었다. 내가 부르르 떠는 사이에 꾸역꾸역 그것이 들어온다. 발이 저절로 버둥거렸다.
첫 경험 당시, 다 들어왔을 때도 아파서 이렇게 동동거렸다. 그래도 금방 김유을이 물러났었다. 그런데 이번은 물러나지 않는다. 내 귓가에 입술을 부드럽게 맞추고, 조금만, 이라고 속삭였다.
“아, 으…….”
김유을은 ‘조금만’이라는 말마따나 부드러이 내 안에 쑤셔 넣었다. 가만히 있다가, 내 버둥거림이 잦아들 때 즈음 쓰윽 빼내갔다. 나는 다리를 그의 허벅지에 자꾸 올리려고 했다. 그를 내심 의지하고 싶었나 보다. 김유을은 어찌할지 몰라 방황하는 내 다리를 꽉 잡았다. 희롱하듯 부드럽게 내 발목을 매만진다. 양다리가 그의 손에 붙잡혔다. 나는 매달리듯 그의 목을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흐, 아…….”
숨이 부서져 흩날렸다. 김유을은 들어오면서 허리를 느긋이 흔들고, 다시 빼내면서 내 입술을 훔쳐갔다. 지금까지 아프다고 난리 친 내가 무색할 정도였다. 고통은 설탕처럼 단 흥분에 뒤덮이고 있었다. 김유을은 내가 숨을 가쁘게 쉬자, 잘했다는 듯이 내 콧잔등에 입을 맞췄다.
“좀 내려와.”
“아…… 응?”
두 번 묻지는 않았다. 내 허벅지를 더욱 아래로 푹 내렸다. 그에 의해 나는 완전히 그의 밑에 깔린 모양이 되었다. 나는 김유을의 목에 두른 손을 놓치고 어깨를 잡았다. 김유을은 그 모든 과정을 소리 없이 지켜보았다.
“언제, 빼?”
“왜 빼.”
“안 빼려고?”
그때 김유을이 웃었다. 아까와는 달리 조금 빠르게 안으로 짓치고 들어온다. 놀란 내가 다시 몸을 빼기 위해 상체를 들었다. 도망가자, 내 허벅지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는다. 느낌이 영 이상했다. 벌벌 떨려 도망치고 싶었다. 의식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흔들었다. 김유을이 내 목덜미에 부드러이 입술을 문질렀다.
“유을아……. 아, 잠깐만, 잠깐…… 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입술이 먹혔다. 김유을의 손은 허벅지부터 쓸면서 올라가 내 허리를 잡았다. 허리가 그의 양팔에 잡혀 꿈쩍하지 못한다. 내게 상체를 드리우고, 이제 굵은 성기는 음부의 살을 벌리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본능적으로 밀어냈으나 소용없었다. 들어온 성기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누구보다 내가 먼저 아는 사실이었다.
“잠깐……. 아!”
굵직한 성기가 어딘가를 쿡 찍었다. 아픈 와중에서 묘하게 찌릿한 구석이 있었다. 김유을이 눈빛을 달리했다. “여기였지.” 물었다.
“유을아……. 으, 흣.”
“부르지만 말고…… 말하든가.”
“거기는 그만하……. 아!”
김유을은 미쳤다. 구제하지 못할 미친놈이었다. 아예 건수라도 잡은 것처럼 거기를 계속 찧었다. 내 허리를 안은 손 하나를 내려 불거진 음핵을 꾹꾹 누른다. 내가 그만하라고 말하는데도 소용없었다. 허리를 빼었다가 쑥 집어넣는다. 그리고 가운뎃손가락으로 둥그런 음핵을 민망스럽게도 돌린다. 간질이는 듯하나 전혀 부드럽지 않은 손길이었다.
“아니, 아…… 아!”
주먹으로 가슴팍을 쳐보기도 하고, 다리를 휘저어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두는 게 좋은 자세임을 알았다. 김유을의 어깨를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잡았지만 사실상 그는 약탈자일 뿐이었다. 나는 얘가 이렇게 못되게 웃는 애인지 처음 알았다.
“미안, 미안해. 응? 아, 아!”
“아, 내가, 더 미안.”
김유을은 사과하듯이 내 어깨에 입술을 문댔다. 그가 계속 짓쳐 박는 곳, 손가락 지문이 닳을 정도로 만져대는 곳. 푹푹푹, 허리가 신랄하게 움직였다. 김유을은 내 허리를 잡은 손을 올렸다. 무릎을 세우더니 금세 일어나 앉고, 그 위에 나를 태웠다.
마주 보게 된 우리는 서로의 엉망인 얼굴을 처음 보게 되었다. 나는 내가 울었는지도 몰랐다. 다급히 내 음핵 위에서 둥그렇게 굴리는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즐기고 있었다. 내가 제 손을 잡고 낑낑거리는 동안, 그는 착실히 허리를 추어올리는 중이었다.
“하으, 으, 읏!”
내가 굼뜨게 움직이자, 아예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들었다가 놓는다. 폭력적으로 쏟아지는 감각에 머릿속이 진탕되었다. 이건 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쾌감이었다. 머리끝이 쭈뼛 섰다. 나는 그의 손을 떼어놓는 것을 포기했다. 유을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손을 허벅지에 올려두었다가 그의 목을 잡았다가. 난리를 피운 다음에야 온전히 감각을 느꼈다.
“아, 응……. 아!”
“유을아, 유을아, 부르면서 울어야지.”
실상 지금도 울고 있었다. 내가 우는지도 몰랐는데 말이다. 유을은 성기를 짓쳐 박으며, 내 우는 얼굴을 신이 난 듯 돌려봤다. 그는 갑자기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미간을 찌푸리다가 나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끝나는 건가 싶었다. 그대로 몸이 뒤로 넘어가기 전까지는.
“싫, 야! 아, 으!”
김유을의 거친 숨소리가 내 어깨에 쏟아졌다. 나는 바닥에 쓰러졌고, 그는 내 위에 올라타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성기가 쿵쿵 찧는다. 김유을이 팔을 뻗어 내 머리를 껴안았다. 몸이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그의 품에 가득 갇히고 말았다. 반동에 의해 몸은 올라가는데, 그가 억지로 붙들었다. 그 이상한 힘겨루기에서 나는 어디로도 벗어날 수 없었다.
아픈 여자처럼 김유을의 어깨를 잡고 울었다. 울면서 허리를 이리저리 옮겨보다가 포기했다. 하는 수 없이 다리로 그의 허리를 묶었다. 점점 이상해진다. 빨간 비상등이 더는 보이지 않고, 그냥 내 눈앞이 빨갛다.
“아!”
마지막 비명처럼 그 소리밖에 없었다. 더는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물었다. 내가 떨자, 김유을은 다급히 나를 들어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안 그래도 숨이 안 쉬어지는데 죽일 셈인가. 심지어 아래는 계속 진행 중이었다. 김유을의 무식한 성기가 쭈우욱 미끄러져 들어와 끝까지 찌르며 나아간다.
“아…….”
김유을이 무너진 표정으로 내 뺨에 입술을 눌렀다. 허리를 두어 번 빠르게 나아갔다가 들어오더니, 마지막에는 조절하지 못하고 가장 세었다. 쏟아내며 박아 넣고 말았다. 김유을이 제 숨을 내 귓가에 길게 뱉었다. 하필 사정도 길었다.
“나, 나가.”
목소리가 갈라진다. 억울할 것도 없건만 나는 왠지 억울해졌다. 불구대천 원수라도 되는 양 그를 노려보았다. 눈물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나 마나, 김유을은 오히려 나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왜 그래…….”
결국 무서워진 내가 한발 물러섰다. 김유을의 손을 꽉 잡았다. 김유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침을 부드럽게 삼킨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벌리더니, 제 티셔츠를 밑에서부터 목 위로 끌어올렸다.
“옷을, 왜 벗어?”
아직 밑이 연결된 채였다. 가만히 사정 후의 뒷맛을 즐기는 줄 알았던 성기가 부드럽게 물러났다. 다시 슬금슬금 안으로 들어온다. 예민해진 음부는 움찔거리며 그 흉악한 것을 다 받았다. 나는 경악하며 상체를 움직였으나 이미 손바닥 안이었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눌렀다.
“못 나간다고 했잖아.”
“그게…… 으!”
김유을이 다시 거칠게 입을 맞춰왔다. 내 혀는 빳빳해서 움직이지 못하는 와중, 그의 혀는 들어와 능숙히 앗아갔다. 그동안, 그동안 밑도 제 할 일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손가락 또한 다시 제 위치로 가서, 툭 튀어나온 그것을 닳도록 누른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을 우리 둘이, 이 밤에 건넌 것이었다.
AAAA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