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 cowardly winter RAW novel - Chapter 6
5. 어언간 온 겨울에
햇살이 여름 못지않게 내리쬐던 날, 나는 할머니와 할머니 친구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드렸다. 친구분들이라고 해서 할머니 또래일 줄 알았는데, 스물을 겨우 넘긴 베트남 아가씨도 껴 있었다. 할머니는 늙어서 나이를 따지냐며, 다 같이 학교에서 한글을 배우는 동무라고 했다.
“아, 디귿이구나. 디귿!”
“갈 때 됐나 봅서. 시옷이다.”
할머니의 친구들은 유쾌했다. 글만 몰랐다 뿐이지 아는 것도, 하고픈 것도 많았다. 그중에서 할머니의 베스트 프렌드라는 영욱 할머니의 꿈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
“은행 가서 일케일케 내 이름 적어보는 거.”
할머니들은 맛나게 떡을 드시다가도 수업만 시작되면 눈을 빛냈다. 글을 배우지 못한 사연도 제각각이었다. 한 명 한 명의 얘기를 듣다 보면 절대로 대충 할 수가 없게 된다. 가벼운 과외라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무거워진 것도 그즈음이었다.
베스트셀러에서도 얻지 못한 위로를, 남의 인생사에서 얻었다. 나만 삶을 톱니바퀴 구르듯 굴렀던 게 아니구나, 나만 톱니바퀴 아래에 깔려본 게 아니구나, 하면서. 오히려 내가 배운 듯한 과외가 끝나고, 영욱 할머니가 고물 자전거를 주고 갔다. 자전거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내 말을 들은 것이었다. 장난삼아 얘기한 것인데 과외비라며 주셨다. 녹이 슨 그 자전거는 돌아가신 남편 것이었다. 아끼던 것을 주셨으니, 나 또한 아껴 타리라 약속했다.
영욱 할머니 덕분에 내 하루는 많이 달라졌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할 겸 자전거를 타고 시내까지 간다. 가는 길에 마주치는 거라곤 이따금 경운기를 끌고 가는 아저씨뿐이었다. 우리는 서로 눈인사를 하고, 나는 시내로 아저씨는 집으로 간다. 겨울바람에 귀가 시릴 때 즈음에 피아노 학원 앞에 도착한다. 그러면 막 학원 문을 열던 원장님이 내게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
원장님이 끓여주는 따듯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뒤, 한 시간씩 음표를 배우고 건반을 눌러본다. 아직 내가 배우고 싶은 곡의 악보도 보지 못하니까, 우선 바이엘부터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피아노 교습 시간이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 시내에 간다. 둘러보다가 먹고 싶은 것을 포장한다. 그리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할머니 집으로 돌아간다. 할머니는 김유을이 이미 학교에 데려다준 후고, 이 빈집은 그가 지키고 있었다.
그는 내가 올 시간에 맞추어 대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 달라진 일상에 가장 초조해하고 불안해진 것은 그였다. 자유롭고 홀가분해진 나와는 달랐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얼굴로 대문 앞에서 만나,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곤 내가 포장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강의?”
“응.”
그 짧은 과외를 마치고, 나는 밤새워 뒤척이며 생각했다. 한글학교에 선생님은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기도 했다. 자격은 그럭저럭 충족하는 것 같았지만, 나한테 아직 누군가를 가르쳐야겠다는 확신은 없었다.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다. 일단은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원자격증이 있는데, 그거라도 따볼 요량이었다.
“왜 갑자기.”
“해보고 싶어서?”
나는 사온 샌드위치를 그의 입 안에 넣어주며 말했다.
“열심히 공부해야겠더라. 오랜만에 뭘 배우려니까 머리가 다 아픈 거 있지.”
김유을은 알았다는 듯이 느리게 샌드위치를 씹었다. 먹는 것은 샌드위치인데 표정은 모래를 씹는 것처럼 퍽퍽해 보였다. 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나는 적어도 그가 기뻐해 주지는 않더라도 기특해할 줄은 알았다. 내가 무언가를 배우고 싶다고 한 게, 그에게 말한 것은 처음이지 않나. 그러나 그는 내가 뒹굴거릴 때를 더 반기는 눈치였다.
“그 사람.”
나도 퍽퍽해진 샌드위치를 씹고 있을 때, 그가 조용히 물었다.
“남자는 아니지.”
“누구?”
“피아노.”
나는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그가 퍽 이상한 것을 묻는다 싶었다.
“여자야. 그것도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으신.”
김유을도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그는 내게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표정이 바깥에 부는 바람보다 싸늘했다.
“이상해서. 내가 데리러 가는 것도 끔찍이 싫고, 데려다주는 것도 만류하고. 꼭 바람피우는 사람처럼 그러잖아, 너.”
“자전거 타고 다니는 게 운동도 되고. 그리고 취미로 배우는 피아노 선생님까지 내가 너한테 일일이 소개하고 그래야 해?”
“네가 나한테 숨기려 들고 있으니까.”
“뭐를.”
김유을은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가 삼켰다. 그리고 다시 샌드위치를 들어 제 입에 가져가려다가 맥없이 상에 놓는다. 껄끄러운지 혀로 입 안을 훑는다. 그는 털을 삐쭉 세운 야수 같았다. 이를 세우고, 적기만 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샌드위치를 포장지에 도로 넣었다. 이걸 지금 먹었다가는 체할 게 분명했다.
“유을아.”
아무래도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시골집에 더는 그를 묶어둘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다.
“말하지 마.”
유을이 머리가 아픈 듯 눈을 감고 이마를 눌렀다. 나는 그 모습에 동작을 멈췄다. 지끈거린다는 듯이 그는 머리를 누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빨리 다가갔다.
“왜 그래.”
“됐어.”
“머리 아파?”
곧장 일어나서 티브이 밑에 서랍장을 열었다. 할머니가 거기에 자주 두시는 두통약이 있었다. 나는 그걸 얼른 꺼내어 손에 쥐었다. 김유을의 앞에 가져가 눈앞에 내밀었다.
“먹어. 두통약이야.”
“스트레스 받으면 가끔 이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는 아예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나는 약을 든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고서 나를 바라본다.
“너 진짜 바람피우는 건 아니지.”
황당함에 내가 아무 말을 못 하고 있자, 김유을은 상 위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 올려진 내 핸드폰을 거칠게 가져갔다. 그가 익숙하게 핸드폰을 열고 들어갔다. 무언가를 휙휙 확인하더니, 통화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났다.
“뭐 하는 거야?”
내가 손을 뻗자, 내 손목을 잡는다. 그가 나를 노려보며 전화를 계속 이어갔다. 연결음은 계속되고, 이윽고 익숙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 해우 씨?
피아노 원장님이었다. 그는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순순히 내 허벅다리 위에 올려둔다. 그는 약간의 숨을 깊이 마신 뒤, 내 어깨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앞으로 내가 데려다줄게.”
“유을아.”
“데려오고.”
헛다리 짚듯 잘못 짚었다. 이건 지탱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유을은 이미 병들어 있었다. 단순히 나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 병에 걸려 있었다. 청봉리에서 병든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나는 안쓰러운 그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 서울로 올라가.”
김유을은 가당치도 않는다는 듯 웃었다.
“내가 왜?”
“정상이 아니잖아. 하던 일도 다 내팽개치고 와서…….”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유을이 다가와 내 입술을 삼킨 것이다. 거칠게 밀고 들어와 내 혀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옭아맨다. 내 뺨에 짧게 입술을 부딪치고 돌아와 혀를 쭉쭉 빨아먹는다. 내 입 안을 광포하게 헤집고 가진다. 저를 따라가든, 따라가지 못하든 상관없어 한다. 그저 자신이 가지는 것에 취해 있었다.
“사랑해.”
그러니까 입 다물어.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항상 달콤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목소리가, 그의 눈이, 그 안에 도사린 위태로움이 보였다. 나는 그의 키스를 가만히 받아냈다. 그가 빨아당기면 빨아당기는 대로, 내 윗입술을 살짝 물면 무는 대로. 가끔은 그와 같이 입술을 부딪치고, 호흡을 맞춰주기도 했다. 반항보다 일찍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순종이었다.
그 짙은 키스가 멎어갈 즈음, 김유을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넌 나에게 익숙해졌어.”
“유을아.”
“내가 그렇게 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가 내 목을 살짝 깨물었다.
“방해하지 마.”
“…….”
“우리 행복했잖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를 망가트릴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이미 손댈 수도 없이 망가진 채였다.
* * *
김유을의 아침 일상은 나로 인해 바뀌었다. 함께 씻고, 함께 아침을 먹었다. ‘학원까지 자전거 타고 갈게.’라는 말은 거부당한다. 그는 내가 차에 타지 않으려고 하면 안아서라도 태운 다음, 무작정 시동을 켰다. 액셀부터 밟으며 내 말은 묵살한다. 얼굴은 전혀 미친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평안했다.
바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내가 피아노 레슨을 받고 나오는 그 순간까지 주차장에서 나를 기다린다. 내가 자전거를 타기 전에, 누군가를 따로 만날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보다. 결국 매번 나는 그의 차를 타고 올 수밖에 없었다.
그를 서울로 올려보내야 한다. 그가 없는 삶에, 내 삶에 집중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김유을은 내 이런 걱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내가 자신의 품에서 먹고 자고만 할 때를 그리워했다. 그때의 그는 온화하고 자상하고 나를 생각해 주는 이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다. 문제는 내가 나서는 걸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하, 아! 응!”
강의를 들을 시간이었다. 일부러 켜놓은 내 노트북을 보고도 나를 유혹하더니 기어코 내 가슴을 물었다. 봉긋한 선을 따라서 혀를 내밀어 맛보고, 내 유륜을 쭈욱 빨아당겼다. 잠자리가 어색했던 우리는 어디에 갔는지. 그는 나만 보면 아랫도리가 빳빳해지고, 나는 밑이 젖어갔다.
더 이상 우리를 허울뿐인 연인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서로의 몸을 만지고, 나누고, 눈으로 서로를 탐하고. 나는 그의 손이 몸에 닿으면 다가올 쾌락을 저절로 생각하게 됐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이용해 나를 묶어두려는 김유을의 행보는 괘씸하기까지 했다. 내가 책상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뒤에서 커다란 성기를 쑤셔 박았다. 재차 허리를 흔들며 깊숙이, 더 깊숙이 들어오도록 내 허리를 당긴다. 여기서 겨우내 몸을 섞었던 우리였다. 같이 붙어만 있어도 열이 올랐다. 그런데 습한 밀지를 그가 곧추선 성기로 쑤시고, 서로에게 함락되면 어찌 되겠나. 다음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게 필요한 시기가 있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그에게 매달린 나날들이.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최고의 아군인 동시에, 최악의 적이었다.
“하아…….”
성기를 목구멍까지 밀듯 들이댄다. 발가락을 쳐들고 떨었다. 정액을 싸대는 것처럼 허리를 움직이고 있으나, 실상은 아직도 빳빳하게 일어선 상태였다. 무정한 끝으로 할퀴듯 속살을 파고 있다. 내 쭈뼛 선 젖꼭지를 가볍게 당기며 농락한다. 바쁘게 온몸을 희롱하던 그가 상체를 내려 내 귓불을 물었다. 그러면서 짐승처럼 허리를 놀려댄다.
“으읏, 으, 아!”
가벼운 절정이 계속되고 있었다. 뜨거운 숨과 함께 그의 허릿짓도 강해진다. 아예 내 허리를 제 손으로 안고서 박자를 타고 있었다. 굵은 성기가 쑤시는 모양을 따라서 음부가 벌어지고 속살은 물에 젖었다. 푹푹푹, 세 번을 연속으로 찧자 다리가 오므라들었다. 나는 비명 같은 신음과 함께 쓰러졌다. 그때 그가 곧바로 제 성기를 뽑았다.
“아, 유을아!”
절정에 달한 내 음부를 곧바로 입으로 가져간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애무였다. 나는 그의 얼굴에 주저앉듯이 앉아서 울어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 허벅다리를 꽉 잡은 다음, 아무 데도 도망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울면서 허리를 떨고, 그의 입 안에 민망한 물을 쏟아냈다. 그는 혀를 끝까지 밀어 넣어 부드럽게 그 모든 물을 훑었다.
그리고 정신없는 내가 울지도 못하고 멍하면, 그는 내 음부에 잘했다는 듯이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떠는 내 다리를 활짝 벌려, 아직 사정하지 못한 제 성기를 다시 꽂는 것이다. 밀어낼 힘도 없는 나였다. 미끄러지듯이 들어오는 그의 성기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면 그가 나를 쓰러트리고, 바닥에 엎어진 나는 처음부터 반복하게 된다.
이것은 내가 정신을 놓고 적극적으로 그를 품거나 그의 정액에 절여질 즈음에 끝이 난다. 온 방 안에 정사의 향이 가득하면, 그는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그는 햇살이 내 몸에 쏟아지는 걸 좋아했다. 부드럽게 웃으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하는 입맞춤 같지만, 실상은 희롱당할 대로 희롱당한 여인을 위한 위로밖에 되질 않는다.
할머니를 학교에 보낸 것도, 이 집에서 온전히 나를 가지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가 내 뺨에 아예 코를 박고 잠이 들 즈음, 나는 힘이 빠질 대로 빠져 누웠고, 그는 내게 팔베개를 해주었다. 그렇게 해대고도 내 몸을 어루만지는 그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그만해…….”
멈칫한 손이 내려간다. 그는 나를 꼭 끌어안았다. 나는 힘없이 딸려가 그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밀어낼 힘도 없었다.
“유을아.”
그가 땀에 젖은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지친 내 얼굴을 조심스레 끌어다가 제 얼굴 밑에 놓는다.
“왜.”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내 딴에는 진지하게 물어본 것이다. 자꾸 그가 이상한 고집을 부리면 우리 둘은 이 시골에서 처박혀 살 수밖에 없었다.
“집, 구할까.”
“무슨 집?”
“우리 둘이 살 집.”
그는 당당하게 동거를 얘기하고 있었다. 내가 보수적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결혼 날짜를 잡은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아직 자리를 잡지도 못했고 자기는 지금 여기에 처박혀 있으면서. 무슨 동거를 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나는 아직 여기에 있고 싶었다. 피아노 학원도 좋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을 때 맡는 겨울의 냄새도 좋았다. 내가 모르던 할머니에 대해 알고 싶었다. 내 시발점은 여기에 있었다.
“여기 있을 거야, 나는.”
“알아. 그래서 나도 여기에 있잖아.”
“나 어디에 안 가. 여기 있을 테니까, 여기서 내 할 일 하고 있을 테니까. 너는 가서 네 할 일 하고 오란 말이야. 그전에는 잘했잖아. 내 일 하고, 네 일 하고…….”
“날 버리려고 했으면서.”
“…….”
“이제 내 쓸모가 다 했나 봐?”
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는 남은 변명을 모아서 그에게 들이밀었다.
“여기 와서 연락하려고 했었어. 그전에도 버리려고 한 게 아니라, 어차피 진실을 알면 네가 날 버릴 것 같아서, 그래서 시간을 갖자고 내가 비겁하게 던진 거야.”
“힘들 때마다 가장 먼저 나를 버리고, 괜찮아지면 가장 늦게 나를 주우니까.”
“유을아.”
“힘들면 자존심 때문에 나를 버리겠지. 괜찮아지면 미안하다는 이유로 가장 늦게 찾겠지. 그 사이에서 미쳐 가는 나는 안중에도 없이.”
“…….”
“그전이라면 기다릴 수 있었을지 몰라. 너를 맛보고, 진짜 너를 나에게 보여주기 전이라면. 그래, 씨발, 몇 년을 기다렸는데 까짓것 못 기다릴까.”
그는 화난 게 아니라는 듯, 굳어 있는 내 입술을 부드럽게 훔쳤다. 아주 가벼운 키스였다.
“이젠 못 해. 내가 안달이 나서 못 해. 난 행복해져 버렸어. 그게 어떤 건지 알아버렸다고. 정말 버려? 나를 두고서?”
“안 버려. 안 버린다고!”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상처받는 게 두려워 숨어버린 사이, 그는 내가 만든 성벽 바깥에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무뚝뚝하다 못해 차가워졌다. 그가 무정하다고 생각한 세월이, 사실은 그가 나를 계속 기다렸다는 걸. 내가 언젠가 진실을 말하고, 우리가 진짜 연인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기다리던 진실을 말하는 순간에, 내가 저를 버릴 계획을 해둔 것을 알았다. 그는 내가 자신의 고백을 받아줬다는 그 사실 하나에 걸었던 모든 기대가, 내 시간을 갖자는 말 하나에 무너졌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모든 사람을 끊어내고 자신만을 품었던 내가, 그들과 똑같이 끊어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그에게 말 한마디 없이 이 시골로 도망쳤을 때.
“헤어지자는 말, 한번 해봐.”
“김유을.”
“해보라니까.”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못 하는 거겠지.”
나에게 김유을은 잘 보이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나는 김유을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그 사실 하나에 집착해, 다른 것은 보려고 하지 않았다. 유을이 나에게 주는 눈빛, 행동의 의미가 어떤지를.
“넌 이제 나 없으면 안 되니까.”
그리고 이곳에 와서 알았다. 그와는 다른 결이지만, 나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나 혼자만 부정하고 있다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는 걸.
그러나 그걸 이 밤에 고백하기에는 비겁했다. 그에게 신뢰도가 깎이고 깎여 신용불량자가 된 지금은.
나의 고백이 그를 우습게 할 뿐이었다.
그래도 한 가지 생각만은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관계는 우리를 망칠 뿐이라는 것이다. 그 생각만은 견고했다.
* * *
새벽에 믹스 커피를 탔다. 그가 아직 자고 있는 사이에 나는 가볍게 노트북을 두드렸다. 그는 깊이 잠들었는지 키보드가 눌리는 소리에도 눈썹 한 번 꿈틀대는 법이 없었다. 하기야 어제 그렇게 섹스를 해댔는데 지치지 않는다면, 나는 진실로 그의 정체를 의심했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내려놓은 그때, 바깥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곧장 일어나 문을 열었다. 툇마루에 나오니 마구 짖어대는 솔이가 보였다. 할머니가 대문을 발로 열고 계셨다. 나를 보고서는 손에 든 상자를 내밀었다.
“우야. 이거 네 갖다 주란다.”
“뭔데?”
“곶감.”
저번에 할머니 친구분들이 과외비를 준다고 부득불 약속했었다. 말려도 말려도 준다더니 이게 그거인가 보다. 나는 하얗게 분이 피어오른 곶감을 보며 웃었다.
“네한테 과외받았던 사람들, 싹 다 받아쓰기 만점 맞았다. 그래서 내한테 고깝게 굴던 점신이도 어찌나 싸바싸바하던지…….”
할머니는 신이 나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축 집으로 들어가셨다. 아마 또 짐을 챙기려고 오신 모양이다. 한글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친구들하고 겨울 산 오르는 재미에 푹 빠지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우리 남매 생활비를 대느라고 나처럼 인생의 맛도 모르고 사신 할머니였다. 왜 내 슬픔만 보았을까. 같이 불쌍한 사람들끼리 토닥거리지는 못할망정.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그 고등학교 삼학년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지금까지 성장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곶감을 문 앞에 두고, 살짝 방문을 열어봤다. 이불을 덮고 제 팔을 베개 삼아서 자는 김유을이 보였다.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색색거리며 자는 모습에도 웃음이 나온다.
나는 조심조심 툇마루를 내려가 자전거를 빼냈다. 솔이도 눈치가 있는지 내가 나가든 말든 시큰둥한 눈길로 짖지 않는다. 나는 페달을 밟고서 힘차게 앞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 약간의 봄기운이 난다. 겨울이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항상 겨울에 아팠었다. 겨울은 부모님을 잡아먹은 계절이었고, 크리스마스는 끔찍한 휴일이 됐으며, 추위는 안 그래도 외로운 내 옆구리를 시리게 했다.
끝없이 이어진, 별이 듬성듬성 났던 그 밤에 그에게 업혀오던 그 길을 지날 때였다. 전화기가 윙윙 울렸다. 발신자는 보나 마나 빤했다. 한 번 확인했다.
유을이.
나는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디야.
일어나서 잠긴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는 내가 설마 그에게 시달린 다음 날,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나도 사람인 이상 갈수록 적응해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지.
“문 앞에 곶감 있거든? 그거 예쁘게 접시에 놔.”
―어디냐고. 그 피아노한테 가?
“그 곶감이랑 먹을 주스 사러 간다.”
―지금 차 타고 갈 테니까 기다려.
“유을아.”
우리가 사랑을 논하기 전에,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했어야 했다. 믿음 없는 사랑은 모래알이었다. 제아무리 모아서 성을 쌓는다 한들, 조그마한 비바람에도 스러지고야 만다. 나는 튼튼한 성을 짓고 싶었다. 해일이 덮쳐도, 나무의 밑동을 뽑을 칼바람이 와도.
“나 10분 뒤에 갈 거야. 더 늦어지면 전화할게.”
―너.
“잘 기다리면 좋은 말도 해줄 거고. 이따가 봐.”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득달같이 전화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잠잠했다. 설마 차를 타고 쫓아오는 건가. 나는 조금은 무거워진 마음으로 페달을 밟았다.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는 바람에 굴하지 않고 나아갔다.
이번 겨울도 여전히 나빴다. 하고 싶은 일도 아직은 뚜렷하지 않고, 남자 친구는 불신이 가득하고, 내 앞날은 불투명하지만. 지금까지 나를 가리던 허물이, 덧씌운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다.
내가 오렌지 주스를 사고 집으로 다시 가기까지는, 내 예상인 10분보다 훨씬 더 걸렸다. 김유을에게 미안한 일이었다. 거의 집에 도착할 즈음에 자전거를 한쪽에 세워두고 전화했다.
그간 부재중 전화는 찍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대문 앞에서 밝혀졌다. 차 키를 들고 나온 김유을과 딱 마주쳤다. 김유을의 얼굴은 험악했다.
“나 왔어.”
그가 열던 차 문을 닫았다. 거침없이 내 앞으로 오기에 나도 자전거를 끌고 다가갔다. 김유을의 입술이 내게 한 소리를 하려고 열리는 그때였다. 내가 먼저 다가가 그의 팔짱을 꼈다.
“오렌지 주스, 괜찮지?”
무작정 그의 팔을 끌고서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솔이 밥을 주시던 할머니는 곱게 치장하고 계신 채였다. 은행에 가신단다. 솔이 밥을 다 먹으면 귀에 약 한 번만 발라주라고 하셨다. 나와 유을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봄바람 든 것도 아니고, 할머니는 겨울바람이 들었다. 이 겨울에 얇은 코트 하나만 걸치고 대문을 나섰다.
“곶감 봤어? 내 첫 과외비야.”
“손해우.”
“너 내가 과외 여섯 개 뛰었던 거 알아? 내가 보기엔 그 모든 것이 다 내 노하우가 된 것 같아.”
그는 싸늘하게 나를 바라보면서도 이미 툇마루에, 예쁜 상 위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 모양 접시에다가 곶감을 놓았다. 약속한 10분을 넘기자마자 뛰쳐나온 모양이었다.
“그거 분리불안증이라고 하던데.”
나는 일부러 놀리듯이 말했으나 김유을은 웃지 않았다. 나는 그의 유리컵에 오렌지 주스를 가득 따라줬다.
“겨우 2분 늦었어.”
“알아.”
갑자기 순순해진 그가 내가 따른 주스를 입으로 넘겼다. 그러나 시선은 내게 꽂혀 있었다. 나는 곶감을 들어 왕 대접하듯이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아, 해봐.”
김유을은 미심쩍어하는 기색도 없이 곧바로 입을 벌렸다. 나는 그의 입 안에 곶감을 쏙 집어넣고 웃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하긴 했지만, 나는 이제 그의 다른 표정쯤은 구분할 수가 있었다. 김유을은 똑같이 입술이 일자이지만 말이다. 기분이 좋을 때, 날 사랑해서 못 견딜 때, 슬플 때, 화가 날 때. 그의 눈은 거짓말을 못 했다. 입이 알려주지 않는 세세한 감정까지 일러바쳤다.
나는 그가 화가 많이 나면, 그 화를 논리적으로 풀어주기보다 그를 안아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기뻐할 때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오랜 시간을 알았지만, 이제야 그를 알았다.
처음에는 편의점을 혼자 다녀오고, 두 번째는 마트까지 갔다 왔다. 유을은 자고 일어나서 내가 없어지면 기분 나빠했지만, 전화해서 언제까지 돌아온다고 일러주면 참기는 참는다. 게다가 자기가 모르는 타인을 만나는 게 아니라면 넉넉히 기다려줄 아량도 있었다.
그 나름대로 기준도 있었다. 피아노 원장님을 왜 그렇게 싫어하는가 했더니, 자기는 나와 진솔한 대화를 하기까지 몇 년을 기다렸는데, 그 사람은 고작 며칠 만에 그걸 해냈다며 화내는 것이었다. 질투심이 대단한 편이었다.
그러므로 웬만하면 나는 김유을 앞에서 다른 사람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내가 아는 모든 규칙을 철저히 지킨 지 2주째, 김유을은 어느덧 내가 사라져도 전화 한 통이면 안심하기에 이르렀다.
* * *
그와 함께 식빵을 만들던 날이었다. 김유을은 내가 쏟아버린 밀가루를 사러 나갔고, 나는 바닥에 쌓인 밀가루를 치우는 중이었다. 그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응. 왜?”
전화는 분명 연결되었는데 상대방 쪽에서 말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밀가루 묻은 손으로 핸드폰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아뿔싸. 내 핸드폰이 아니었다.
이미진. 김유을의 어머니가 건 전화를 내가 받았다. 나는 침을 삼키고 귀에 핸드폰을 가져다가 댔다.
“여보세요.”
―거…… 김유을 씨 핸드폰 아녜요?
익숙하지 않은 서울 말씨를 짜내는 투였다. 통통 튀는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입술에 침을 발랐다.
“네. 맞습니다. 지금 잠깐 나가 있어서…….”
―애인?
“아, 네. 안녕하세요.”
―세상에, 옴마야, 여보! 여보!
나는 순간 전화가 잘못된 줄 알았다. 잠깐 핸드폰을 귀에서 떼었다. 그러나 전화는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우당탕탕 하는 소음, 옥신각신하는 목소리가 오가고, 스피커폰으로 바꾼 듯 소리가 울렸다.
―손해우 학생 맞지요?
“네, 그렇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머니.”
―맞네, 맞아. 아따 목소리 곱다, 야.
―나도 바꿔봐.
―기다리라.
당신 아들이 나 때문에 시골 머슴이 된 것은 아직 모르는 듯했다. 나는 땀이 나는 손을 허벅지에 문질렀다.
“저, 유을이한테는 제가 곧 돌아가라고 말하겠습니다. 책임지고…….”
―아, 그라지 말고 걔랑 밥 한번 먹으러 안 올래요?
“네?”
몇 년 동안 인사다운 인사 한 번 못 드렸는데도 굉장히 호의적이셨다. 김유을이 나에 대해 어떻게 말을 한 걸까. 김유을의 부모님은 아들의 안부 따윈 관심 없는 듯, 계속 내게 밥 한번 먹으러 오라고 성화였다. 계속 무얼 좋아하냐기에 아무거나 생각나는 대로 말씀드렸다. 솔직히 어떻게 말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난다.
결국 통화는 두 분이 잘못 누르신 것처럼 갑작스럽게 꺼졌다. 그 뒤로 더 걸려오는 것이 없으니, 끊으신 것은 제대로 끊으신 것 같았다. 전화를 와락 걸고 끊는 솜씨가 김유을 못지않다.
김유을이 돌아올 때까지도 나는 얼이 빠졌다. 밀가루를 반도 치우지 못했다. 김유을은 그걸 보고도 왜 치우지 않았냐 하질 않았다. 제 일인 양 무릎을 꿇고 밀가루를 모았다.
“유을아.”
김유을은 빗자루를 든 채로 엎드려 있었다. 나를 힐긋 봤다.
“왜.”
“나 너희 부모님이랑 통화했어.”
김유을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원상태로 표정을 지웠다. 그러냐면서 계속 밀가루를 치운다.
“대체 나에 대해 어떻게 설명한 거야? 설마 재벌 집 딸이라고 그랬어?”
독이 든 잔을 마실까 말까 하는 기분이었다. 있는 집 딸인 줄로 알고 잘해주시는 거면 어쩌나. 또 얼굴에 철판을 두드려야 하나.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의 호의가 실망으로 변하는 것은 싫었다. 그것도 김유을의 부모님이셨다. 걱정이 태산인데 김유을은 웃었다.
“우리 부모님, 너 좋아해.”
“그러니까 왜.”
“성적 올려줬잖아.”
“뭐?”
나는 잘못 들은 줄 알고 귀를 쫑긋 세웠다.
“너 성적 바닥이었잖아.”
“모의고사 성적 받고, 어머니 아버지가 담임한테 전화해서 물었어. 왜 그렇게 애 성적이 올랐냐고. 그때 담임이 네 이름 얘기했고, 나도 간간이 네 이름 얘기했으니까.”
김유을의 성적은 빈말로도 좋다고 못 할 정도였다. 막판에 가서 오르기는 했지만,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내 입장에선 기쁜데, 너희 부모님 입장에서 보면 왜 이리 이야기가 슬퍼질까.”
“내가 너 때문에 정신 차리고 산 줄 알아.”
김유을은 밀가루를 다 치운 다음에 말끔히 일어섰다.
“맞는 얘기고.”
이후에 김유을은 정석대로 식빵을 만들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실수를 연발했다. 김유을은 빤한 내 시선을 모르는 척, 손을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그날 내가 만든 식빵은 엉망이었고, 김유을이 만든 식빵은 완벽했다. 그게 내 집중력의 한계였다. 나 때문에 정신 차리고 살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그의 고백만큼이나 들뜰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를 정신 차리고 살게 해준 사람. 그 과분한 호칭을 내 목에 걸어주는 건 너밖에 없다.
김유을과 나는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을 계속했다. 서로 싫어하는 거, 좋아하는 거 말하기. 절대 하면 안 될 행동, 태어나서 가장 싫었던 사람 말하기. 특히 김유을의 입에서 나올, 태어나서 가장 싫었던 사람이 궁금했다. 정답은 없다, 였다. 그는 태어나서 누구를 싫고, 좋고, 그 분류에 담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쪽으로 무디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와 함께 옛날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생각났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잘 살고 말리라 다짐했던 나 자신이. 이런 호졸근한 나를 상상 못 했을, 파릇파릇하던 내가.
오리털 점퍼가 버거운 겨울의 끝, 봄의 시작이었다. 봄의 소식을 살랑살랑 물어온 그 겨울밤. 우리는 별을 찾아보겠다고 툇마루에 누워 있었다. 나는 그의 허벅다리를 베고, 그는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었다.
“유을아, 너 갑자기 아버지 밑에서 일 배운다고 했었잖아.”
“그런데.”
“나 때문이지? 나한테 잘 보이려고.”
나는 아니면 어떡하나 싶었다. 혹시 몰라 진심을 쪽 빼냈다. 봄바람보다 가벼운 듯,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2년 전인가. 그럭저럭 대학을 졸업한 그가 갑자기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운다고 했었다. 나는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유유히 노는 한량이 될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때.”
하늘에서 별을 찾아보던 김유을은 고개를 내렸다.
“초조했나. 아니면 불안했었던가.”
“응?”
“네가 멀어지는 것 같아서.”
나에게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나에게는 언제나 그 가면을 벗지 않고, 그러다가 너를 놓쳐 버릴 것 같았어. 김유을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사실 다 알고 있어, 하면 넌 도망갈 테니까.”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뭐든 해서 자리를 잡아야지, 너한테 말할 수 있다고.”
“다 안다는 거?”
“그러니까 같이 살자는 말.”
그는 비겁한 나의 은신처가 되어주고 싶었나 보다. 저게 도망칠 게 빤하니, 차라리 준비해 두자 싶었나. 튼튼한 그물망 안에서 낚아챌 작전이었나.
동거라는 큰 각오까지 한 줄 몰랐다. 일이 바빠서 점점 줄어드는 연락 횟수, 날짜를 잡기도 어려운 데이트. 우리의 관계가 끝나가는 시그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 간의 소통이 없다면, 서로의 생각에 갇혀 있으면, 서로가 서로를 한쪽으로 치우쳐 보게 된다.
나는 모든 걸 버리고 떠나온 곳에서 행복을 맛보았다. 나를 쫓아와 내 알맹이를 까보려는 그가 미웠다. 하지만 차라리 초라할지언정, 솔직한 나를 보여주는 것이 나았음을, 약점을 숨긴다고 해서 내가 강인한 것이 아님을, 곪고 썩은 상처는 빵 터져서 내 눈을 멀게 함을, 먼눈에는 판단력이 없음을 알았다.
여기서 화가 난 그가 사랑한다며 고백했었다. 이 툇마루 위에, 겨울밤 아래였다. 나는 그의 손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가 나를 보았다.
“유을아.”
“왜.”
“나랑 사귈래?”
숨 가쁘게 계단을 올라온, 그날의 김유을처럼 해보려 했다. 나는 계단을 뛰어오르지 않았음에도 숨이 찼다.
“사랑해.”
김유을은 입술을 벌렸다. 그의 손을 잡아다가 내 입술에 찍었다. 그의 눈이 헤퍼 보일 만큼 솔직했다.
“믿어줘. 너한테 처음으로 솔직해져 본 거야.”
긴장했는지 손이 약간 떨렸다. 김유을은 버리듯 내 손을 내려놓았다. 굳어 있던 몸을 풀고, 내게 이를 드러냈다.
“나 떼어놓으려고 거짓말해?”
“거짓말 아니야.”
나는 김유을의 왼쪽 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처음에 한쪽 눈을 떴다. 감지 않았으나, 내 입술이 내려감에 따라 흔들렸다. 콧잔등에, 뺨에, 입술로 내려가자 맞물렸다. 수만 가지의 말보다 피부로 읽는 감정이 중요했다. 그에게 더 닿으리라 믿었다.
“단 한 가지만 약속해.”
김유을은 아까보다 따스한 눈빛을 띠었다. 엄지로 그의 입술을 쓸었다. 그는 이다음을 고대하는 표정이었다.
“여기에는 주말에만 내려와.”
“손해우.”
“나도 자격증 따려면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해야 해. 너랑 맨날 섹스하고, 먹고, 놀고, 공부에 하나도 집중이 안 되잖아.”
그가 짜증 난다는 듯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 올릴 때, 나는 이날을 위해 준비한 미끼를 던졌다.
“대신 나 자격증 따면 같이 살자는 말, 생각해 볼게.”
솔직히 그가 우스워할 거란 생각을 했다. 장난처럼 넘길 수도 있다고. 그러나 김유을은 그 말을 듣고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더 나아가 내가 미래에 대해 얘기할 때 토를 달지 않았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는 제스처였다.
그리고 우리는 하루 하고도 사흘을 더 같이 보냈다. 이 겨울의 끝물을 보내고 초봄이 오기 전. 드디어 그가 청봉리를 떠나갔다. 내 말대로 일주일을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틀 만에 돌아왔다.
그리고 3일, 4일, 5일. 그가 서울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는 올 때마다 내가 있는 것에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래도 주말에만 보는 것은 영 마뜩잖아 했다. 그는 서울에서 하루 세 통씩 꼬박 전화를 걸었다. 우리는 서서히 상대를 믿는 마음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을 키워나갔다.
내게 많은 걸 남겨준 겨울을 가슴 한편에 그려둔 채.
여전히 우리는 닭살 돋듯이 안달하는 연인은 아니었으나, 예전과 달리 전하는 말 한마디에서 애정이 보였다. 살아보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유을은 언젠가 말했다. 내 앞날에 그를 포함시켰을 때부터 안심할 수 있었다고. 내가 자격증을 따면 같이 살자고 한 말, 우스갯소리지만 자신에게는 구원이나 다름없었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열심히 살 수밖에 없었다. 주말에 나를 보러 오는 그를 위해서라도. 그를 사랑하는 나를 위해서라도. 우리의 훗날을 위해서라도.
나는 청봉리에서 그를 기다렸다. 그는 서울에서 나를 기다렸다.
그러나 멀어진 거리만큼 확신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언제나 함께할 거란 걸.
* * *
옆집 할머니는 참견이 많았다. 매번 내가 내려올 때마다 어디 대학에 붙었는지 묻고, 무슨 회사에 다니는지 묻고, 월급이 얼만지를 물었다. 할머니의 앙숙으로 종종 나를 자신의 손자와 비교 선상에 올려두기도 했다. 그 할머니는 내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갈 때마다 뛰어나와 물었다. 언제쯤 직장을 다시 가질 거냐고.
“저 피아노 선생님 할까 봐요.”
다음 날 또 쫓아와서 언제쯤 피아노 선생으로 취직하냐고 물으면.
“저 할머니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어서요.”
그 두 가지를 번갈아 말해줬더니 이제는 내가 지나가도 시큰둥해한다. 그 정도의 관심이었던 거다. 옛날에도, 지금에도. 옛날에는 옆집 할머니 삶에 단 1초도 차지하지 못할 물음에 상처받고 허세를 떨었다. 지금은 달랐다. 심술 맞은 할머니의 물음은 단 1초도 내 삶에 머무르지 못한다. 서로에게 의미가 없음을, 상대를 깔아뭉개기 위한 질문임을 아는 까닭이다.
나는 이제 영화 주제곡의 앞부분을 따라서 칠 수 있었다. 피아노 페달을 밟고 감정을 싣는 것은 꽝이었지만, 그래도 이 곡을 치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영화의 주인공을 떠올린다. 그리고 나 또한 그때로 돌아가기도 했다. 영화 주인공이 부러워서 울던 그때로.
봄이 온 청봉리는 내 겨울의 고단함을 씻겨준 듯, 좋은 소식만을 물어다 줬다. 기대하지 않았던 소식도 있고, 내심 긴가민가하면서 기다린 소식도 있었다. 그중 독특한 것을 꼽자면 동생인 해경의 소식이었다.
―누나 미안해.
눈물을 질질 짜는 동생의 전화를 받아준 건, 제 친구들과 기어코 돈을 모아서 입금해 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밴드는 활동 없이 무산됐다. 한 명은 부모님이 잡아가고, 한 명은 노래보다 게임에 빠졌고, 한 명은 이 길에서 희망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속상해하고 난리 쳤던 게 무색할 만큼. 고작 겨울에서 봄이 오는 동안 그 천방지축 밴드는 해체되었다.
강제로 꿈도 대학도 잃은 신세가 된 손해경은 잘못했다고 빌었다. 내가 보고 싶다고 우는데 왜 같이 눈물이 나는 건지. 고소하다고 웃어주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해경의 상처가 커 보였다. 그래도 얘는 제 꿈 때문에 뭐라도 해보려던 거 아닌가. 이미 앙심은 겨울눈이 녹으면서 다 사라진 후였다.
뜻하지 않은 동생의 소식, 그리고 여윳돈. 두 가지가 소식이 주는 것만으로도 기쁜 와중, 혹시나 해서 넣었던 이력서도 합격 소식을 가져왔다. 한글학교 같은 정식적인 곳이 아니라, 회관 같은 데서 간단한 한글을 알려주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 길이 내 길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래도 원장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살아가련다. 주저앉으면 주저앉아서 주변을 둘러보고, 길이 끊기면 다시 돌아가 보고, 그 길이 가시밭길이면 뒤로도 나와보고. 한번 그래 볼 작정이었다.
새로 생긴 직장은 자전거로 갈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모은 예금과 동생이 준 돈을 합쳐 중고차 하나를 뽑았다. 처음에는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학교도 데려다줄 수 있고,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올 때도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으니, 왜 진작 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였다. 내 귀하디귀한 재산 1호가 되었다.
이토록 나의 봄은 짧지만 다채로웠다. 그리고 잠이 들기 전, 나는 기쁜 마음으로 핸드폰을 바라본다. 늘 잠들기 전에 연락이 오기 때문이었다. 어떤 때는 내가 기다리다가 먼저 전화를 한 적도 있었다.
―뭐 하고 있었어.
내 하루를 궁금해하는 그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온다.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내 하루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시골에서의 소소한 하루를 그에게 전달하면, 그 또한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답례처럼 전해준다.
―지금 내려가도 될 것 같은데.
“거짓말.”
거짓말이란 내 목소리에 그가 “보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그의 진심에 가슴이 아렸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몇 시간만 참으면 만날 수 있잖아.”
―넌 별로 안 보고 싶나 봐.
“너 보고 싶어서 차도 뽑았는데? 그거 타고 내가 너 일하는 곳에 몰래 놀러 갈 거야.”
그의 낮은 웃음소리가 내게로 넘어왔다. 나는 눈을 감고 그 감미로운 목소리에 취했다. 그리고 그가 무얼 얘기하는 동안, 나는 조금씩 잠에 빠져들었다. 응, 응, 응. 내 짧아지는 대답에 그의 목소리가 느려졌다.
―잘 자.
“응…….”
그리고 항상 마지막에 주문처럼 말해준다.
사랑해.
그가 들려주고 싶지 않은 듯, 아주 작게 말했다. 때문에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은 내일을 맞이하게 해주고, 나를 다시금 쓰러지지 않게 해주는 그의 주문이었다. 그만은 나에게 등 돌리지 않은 거라는, 감히 영원을 속삭이는 것 같은…….
그렇게 편하게 잠들고 일어나면 핸드폰은 꺼져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그라도 된 것처럼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똑같이 단조로운 하루가 반복된다. 아등바등 살아왔던 내 인생에 대한 보답인 것처럼, 나는 겨우 깃든 평화를 만끽했다. 항상 다사다난했던 겨울을 지나, 이제는 봄을 맞은 나에게.
올해 겨울과 크리스마스는 몹시 기대되는 이벤트였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일도. 어쩌면 할머니와 두 분이 계신 곳에 가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할머니와 부모님의 추모원에 가본 적은 없다. 할머니 나름대로 기일을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미움일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일까. 할머니는 늘 홀로 보내셨다.
그리고 토요일이 되어 할머니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오랜만에 나와 유을이, 할머니 셋이서 저녁을 같이 먹는다. 할머니는 유을이 온다고 냉장고를 뒤적거렸고, 나는 몰래 할머니의 숙제장을 훔쳐본 참이었다. 아까 할머니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머리를 싸매고 쓰는 것을 보았기에.
이번 숙제는 시 쓰기였다. 노을이 지는 때, 나는 툇마루에 누워 할머니의 숙제장을 펼쳐 보았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시가 나왔다. 나는 엎드려서 찬찬히 문장을 음미했다. 반쯤 할머니를 놀리려는 마음이 컸었다.
제목은 겨우리.
어언간 온 겨울에 아버지가 죽었다.
눈이 많이 나렸다.
어언간 온 겨울에 어머니가 죽었다.
추워서 눈물도 얼었다.
남편도 겨울에 하늘로 도망갔다.
그게 내 업보랬다.
그런데 어언간 온 겨울에
우리 딸이 태어났다.
죽을 만큼 싫었던 겨울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시는 삐뚤빼뚤했다. 할머니가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할머니는 겨울에 너무 많은 사람을 잃어서, 또 겨울에 어머니를 잃어서, 하도 울어서 그 눈물이 얼어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할머니는 겨울이 좋다고 적었다. 나도 겨울이 좋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이가 노을을 향해 짖는다. 누군지 알고 있었다. 평일 내내 기다린 만남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숙제장을 곱게 접어서 바닥에 두었다.
내 미소를 자아내는 저 사람. 어언간 온 겨울에 내게 고백한 네 덕분에.
나는 들어오는 너를 향해서 손을 펼쳤다.
네가 있어서 내 겨울은 춥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