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e so good at home cooking RAW novel - Chapter 85
집밥을 너무 잘함 85화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계절, 가을.
가을은 그 어느 계절보다 제철 재료가 풍부해 음식 만드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간식은 더욱 그랬다.
풍미가 가득한 밤과 달콤한 고구마, 그리고 이제는 홍시까지.
며칠 전, 시장에서 본 선명한 주황빛 감이 어찌나 맛있어 보이던지.
빨간 소쿠리에 담겨있던 감을 우빈은 양손 가득 사왔다.
생선에는 조리 방법에 따라 갖가지 모습으로 변신하는 명태가 있다면, 과일에는 감이 그랬다.
말랑하게 먹는 홍시와, 곶감, 그리고 감말랭이.
어떻게 먹어야 제일 맛있을까 고민하던 우빈은 결국 반은 홍시로 먹고, 반은 곶감으로 만들어 먹기로 했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서 감꼭지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먼저 껍질을 최대한 얇게 벗겨냈다.
두꺼운 실로 한쪽 끝은 꼭지에 매달고, 다른 쪽은 옷걸이에 걸었다.
이대로 이 주 정도 내버려 두면 쫀득하면서도 안에는 말랑말랑한 반건시 곶감이 완성되었다.
그에 비해 홍시를 만드는 법은 아주 간단했다.
우빈은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는 감을 올려놓았다.
홍시를 만드는 데는 5일에서 10일 정도의 숙성 기간이 필요한데, 이 감은 보아하니 조금만 후숙하면 곧 말랑한 홍시로 변할 것 같았다.
봄이가 입맛을 다셨지만 보지 못한 척했다.
‘다 익으면 냉동실에 넣어야지.’
너무 꽁꽁 얼지 않은 상태로 홍시를 냉동실에 냅두면 맛있는 아이스홍시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그렇게 완성된 홍시를 디저트로 먹는 날.
“좋아, 잘 익었네. 자, 여기 봄이 숟가락.”
티라노가 그려진 봄이 전용 숟가락이었다.
감을 숟가락으로 퍼먹자 입안이 달콤함으로 가득 찼다.
인공적인 단맛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그야말로 자연이 내려준 단맛에 봄이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마, 마이쪄! 아빠아, 요즘 왜 이렇게 마싯눈 게 마나요?”
“가을이라 그래. 원래 뭐든 제철에 먹는 게 맛있거든.”
맛있게 먹고 있는 봄이를 보니, 왜 가을 하늘은 맑고 말은 살찐다는 말이 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아이스홍시를 먹을 차례였다.
사박사박.
살짝 얼은 아이스홍시는 마치 샤베트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와아…… 우와. 너무 마이쪄요!”
봄이의 볼이 상기되어 발그레해졌다.
“곶감도 보러갈까?”
“녜! 죠아요!”
봄이가 밝게 소리쳤다.
“여기서 조금만 말리면 곶감이 되는 거야. 반건시로 만들 거니까 얼마 안 남았네.”
“반고시가 모예요?”
“곶감처럼 완전히 바짝 마르기 전에 먹는 거야. 그러면 겉은 쫀득한데 안은 말랑하거든.”
“아하아. 마싯게따.”
그렇게 둘이 사이좋게 곶감을 구경하고 있을 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저기, 사장님, 계세요오?”
밖에서 우빈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씩 웃고 있는 유준휘 PD였다.
* * *
“안녕하세요, PD님! 오랜만입니다.”
“제가 요즘 좀 뜸했죠? 기획서 쓰느라 정신이 없어서요. 혹시 지금 양배추참치덮밥 가능할까요?”
유준휘 PD는 전에 주문하던 양배추 덮밥을 주문하고는 씩 웃었다.
참치캔은 늘 통조림햄과 구비를 해두고 있었고, 마침 양배추도 있던 터라 우빈은 얼른 양배추참치덮밥을 만들어 왔다.
“요즘 위는 괜찮으십니까?”
“어휴, 말도 마세요. 괜찮아졌는데, 요즘 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위가 또 따끔따끔해져서요. 제대로 된 식사 좀 해야겠다 싶어서 여길 찾아왔죠. 이야, 모습이 그대로네요. 잘 먹겠습니다!”
유준휘 PD는 그렇게 말하며 참치덮밥을 먹었다.
고슬고슬한 쌀밥과 함께 달달한 양배추가 올려져 있는 참치덮밥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먹었다.
“혹시 방송 출연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방송 출연이요?”
“네, 지금 파일럿 방송을 구상 중이거든요. 셰프와 연예인이 한 명씩 나와서 밥차를 운영하는 방송인데, 제가 생각하기엔 딱, 사장님이 적임자라서요.”
‘아, 지난번에 소현이가 말한 거구나.’
기대에 반짝이는 눈을 거절하기는 미안하긴 했지만.
우빈은 빠르게 말을 잘랐다.
“죄송하지만 방송 출연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왜요? 제 입으로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미 유명하시긴 하지만, 그래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건 또 다를 겁니다. 그냥 텔레비전도 아니고, 잘하면 엠플릭스와 연결되어서 전 세계로 나갈 거고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빈은 여전히 생글 웃고만 있을 뿐, 전혀 설득될 기색이 없어보였다.
“하는 수 없죠. 싫다는 분을 방송에 나오게 하기도…… 그래도,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아시겠죠?”
유준휘 PD는 그렇게 명함을 주고는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놓고 간 명함을 우빈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방송이라…….’
* * *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난 건 한 촬영장에서였다.
“야!! 내가 메이크업 끝나면 도구 똑바로 정리하라고 했어, 안 했어?!”
“죄, 죄송합니다.”
눈물을 떨구면서 바들바들 떠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듯하면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손을 치켜들었다.
그대로 가면 뺨으로 갔을 손은, 누군가에 의해 제지되었다.
바로 가은이었다.
“말로 잘 타이르면 되죠, 그렇게 소리 지르고 하면 서로 기분만 상하잖아요. 우리 좋게좋게 가요, 네?”
가은이 재빨리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손목을 잡아챘다.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손목을 잡은 손에는 꽤 힘이 들어가 있었다.
“…….”
여전히 생글생글 웃던 가은이 손목에 힘을 풀었고, 그제야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손을 빼고는 가은을 노려보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대답 없이 고개를 홱 돌렸다.
쾅!
세게 문을 닫고 나간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방금 일어난 일에 씩씩거렸다.
“좋게좋게라고? 웃기고 있어, 진짜. 누구 덕에 이 자리까지 올라간지도 모르고 말이야.”
배우면 다인가?
‘어차피 조금 예뻐서 뜬 것 주제에.’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손톱 끝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SNS 창을 켜고는 휴대폰 자판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두고 봐.”
그렇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올린 비방글은 널리널리 퍼져 나갔다.
앞뒤 있었던 일은 물론 전부 빼고, 철저히 메이크업 아티스트 입장에서만 쓰여진 글이었다.
손목을 세게 잡아 멍이 들었고, 언어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글.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면서 단순히 무시하려던 가은이었지만, 인터넷에서의 여론은 점점 나쁜 쪽으로 변했다.
“오빠, 얼마 전에 CF는 어떻게 됐어? 이번 주에 미팅하자고 했다면서.”
“그게…… 안 그래도 오늘 연락이 왔는데, 다른 사람으로 바꾸겠다고 하더라고.”
“그, 그렇구나.”
가은의 어깨가 축 내려갔다. 시무룩해하는 가은을 보고는 매니저가 얼른 가은을 달랬다.
“어차피 그 광고주 별로 소문도 안 좋아서 찜찜했는데, 오히려 다행이야. 얼른 다른 광고 연락해 볼 테니까 너무 걱정 말고.”
호들갑까지 떨어가는 매니저의 모습을 보고 가은이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 한들 자신이 한 일에 후회는 없었다.
해명글을 써볼까 했지만 괜히 불에 기름 붓는 꼴만 될 수 있다며 주위 사람들이 그녀를 말렸다.
누군가 한 명이라도 그녀를 알아주었으면 해서.
그리고 가은은 그렇게 무작정 오늘밥집으로 찾아갔다.
* * *
“어, 우빈아, 난데. 잠깐 시간 괜찮을까?”
검정 마스크에 선글라스, 모자까지.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항상 쾌활한 가은이 눈에 띄게 기운이 없자 우빈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 너 인터넷 잘 안 보는구나.”
가은이 기운 없이 픽 웃었다.
온 세상이 자신을 욕하는 것만 같았는데, 그러고 보면 이렇게 자기 일에 바빠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우빈이었다.
보여줄까, 말까?
‘하지만, 우빈이라면…….’
잠시 고민하던 가은이 우빈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사실은, 이런 글이 올라왔는데……. 요즘 이것 때문에 난리네.”
처음에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던 가은이었지만, 우빈에게 전말을 말하면서 이내 코를 훌쩍일 수밖에 없었다.
“우빈아아. 나 진짜 억울해. 너, 너는 나 믿지?”
슬플 때만 눈물이 나는 줄 알았는데 너무 억울하면 눈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물론 가은을 속속들이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몇 년간 만나지 못한 공백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남한테 해코지할 녀석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빈이 기억하고 있는 어렸을 때 천성이 그대로 갔다면, 그리고 안지희를 챙겨달라고 부탁할 만큼 가은의 성격이 크게 변한 것이 없다면.
“세상에 널 안 믿으면 누굴 믿냐.”
우빈이 가은에게 휴지를 건네면서 답했다.
우빈의 그런 담담한 태도에 가은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흐어어어엉. 넌 왜 갑자기 이런 때 감동을 주고 그래.”
그런 가은을 보고는 봄이가 놀라서 후다닥 달려왔다.
“엉니. 갠챠나??”
“아니이. 네 아빠가 나 괴롭혀.”
“어, 어어어?! 아빠가?”
혼란스러워하는 봄이를 보고는 가은은 잽싸게 “장난이야.”라고 정정하고는 코를 세게 풀었다.
그런 가은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우빈은 냉동실에서 반 건시를 꺼내왔다.
“자, 하나씩 먹어.”
“이게 뭐야? 감……?”
“응. 내가 건조시킨 거야.”
몇 번 먹어서 익숙해진지라 봄이는 얼른 반건시를 양손에 들고 냠냠거리며 먹었다.
훌쩍거리던 가은도 이내 천천히 반건시를 집어들었다. 겉은 쫀득하면서도 안은 홍시처럼 말랑하면서도 촉촉했다.
“마, 맛있다……. 하나 더 먹을래.”
“먹어라, 먹어.”
우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반건시를 세 개 정도 가은의 앞에 놓았다.
많이 먹으면 변비에 걸릴 수 있었기에 봄이에게는 되도록 많이 주고 있지 않았지만.
우빈은 봄이를 품에 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를 잘 모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네가 잘못한 일도 아닌데 숨을 필요 없다고 생각해.”
“그건 그런데…… 갑자기 일감도 뚝 끊겼어.”
우빈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이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가은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문을 올릴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건 가은도 동의하는 바였다.
“정면돌파하자.”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사람들의 오해를 풀려면 그녀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그것도 최대한 빠르게.
우빈은 그렇게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이렇게 방송에 출연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안녕하세요, 유준휘 PD님. 오늘밥집의 강우빈입니다.”
* * *
한편, 우빈의 전화를 받은 유준휘 PD는 머리를 감싸매고 있었다.
‘끄응. 지금 논란이 있는 배우는 웬만하면 피하자는 게 내 원칙이긴 한데…….’
가은과 같이 일해본 적이 있던 유준휘 PD인 만큼 이번 사건이 단순한 루머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이 없다 한들 연예계라는 것이 그렇게 너그럽게 굴러가지는 않는 판인 걸 알기에, 유준휘는 고민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강 셰프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이전부터 러브콜을 보냈었지만 절대 끄떡없던 우빈이었다.
몇 번이나 가은을 통해 프로그램에 출연을 제의했지만, 우빈이 거절하는 사이에 프로그램은 한번 엎어지기도 했다.
거의 포기하던 찰나였다.
그렇게 단호한 우빈이 가은과 같이 출연하는 것이 조건이라고 하는 의도도 어느 정도 짐작은 갔다.
‘동창이라고 하더니, 꽤 친한 사이인가 보네. 으아아, 그런데 이런 문제는 자칫하면 강셰프까지 같이 번진단 말이야.’
아무리 우빈이 출연에 동의했다고는 한들 조심스러웠다. 괜히 끼리끼리라면서 애꿎은 사람한테 피해가 갈까 봐였다.
이런 이슈조차도 노이즈마케팅이라 방송에 적극 활용하는 사람도 간혹 있었지만, 유준휘 PD는 그런 류는 아니었다.
계속해서 책상에 쿵쿵 머리를 박았다.
“어쩌지, 어쩐다…….”
그리고 한참 뒤.
책상에 구멍이 나기 직전 즈음에, 유준휘 PD가 마침내 중얼거렸다.
“그래…… 원래 인생이 모 아니면 도라고. 한 번 던져보자고.”
그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