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re so good at home cooking RAW novel - Chapter 90
집밥을 너무 잘함 90화
도시락을 사러온 것은 유준휘 피디였다.
“와아, 오늘은 닭볶음탕이네요? 이거 진짜 좋아하는데. 다른 반찬도 맛있어 보여요.”
오늘밥집이 도시락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아직 몇몇만 알고 있었다. 우연히 제보를 받은 유준휘 피디가 이른 아침부터 오늘밥집에 방문한 것이었다.
옆에 팻말에 붙어있는 ‘한 명당 2개까지만 구매 가능합니다.’라는 문구를 보고는 유준휘 피디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운이 좋네요. 오늘 같이 밥 먹는 사람이 조금 입맛이 까다롭거든요. 그래도 여기 도시락이면 걱정 없죠.”
유준휘 피디는 그렇게 든든한 천군만마를 얻은 듯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는 도시락을 사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유준휘가 도착한 곳은 한 촬영장이었다.
조연 배우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감독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니지, 여기서는 더 절실하게 연기를 해야지.”
그 모습을 본 제작진들이 옆에서 수군거렸다.
“오늘, 감독님 어딘가 심기가 안 좋아 보이지 않아?”
“그러니까.”
평소에도 까칠하기로 유명한 한수연이었지만 오늘은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유준휘 피디가 촬영장에 도착했고, 퀭해 보이는 얼굴을 한 여자가 그를 반겼다.
“먹고살려고 일하는 건데. 밥 먹고 하자.”
“……어, 왔어?”
“밤 샜냐?”
“촬영하면서 밤 안 새는 사람이 더 드물지. ……이건 뭐야?”
“도시락. 놀러오는데 빈손으로 오기 좀 그렇잖아.”
“뭘 이런 걸 사와. 어차피 아침이라 입맛도 없는데.”
우물우물.
큰 기대 없이 닭볶음탕을 입에 넣은 한수연이 놀라 젓가락을 문 채로 몸이 굳었다.
“뭐야, 왜 이렇게 맛있어? 떡도 들어가 있고.”
야들야들한 닭다리의 살을 모두 발라낸 한수연이 이번에는 국물을 한 모금 떠먹었다.
길쭉한 대파와 함께 듬뿍 담긴 마늘 때문인지 시원한 느낌이 드는 국물. 결국은 밥을 국물에 싹싹 비벼서 깨끗하게 도시락을 해치웠다.
“너무 잘 먹었어. 이 집 이름이 뭐야? 도시락 전문점이야?”
개운하게 식사를 마친 한수연이 티슈로 입가를 닦아냈다.
“아니야, 밥집인데 아침 특선으로 한정 판매하는 도시락이야. 내가 특별히 너 촬영장 놀러온다고 챙겨온 거야.”
어깨를 으쓱거리는 유준휘 피디를 보고는 한수연이 픽 웃었다.
“도시락이 이렇게 맛있는데…… 나도 한 번 가봐야겠네.”
평소에 말이 많지 않은 편인 한수연이었다. 그녀의 영화도 그런 그녀의 성격을 따라가는 듯, 절제되고 담백한 분위기의 영화였다.
그런 한수연이 이렇게 말이 많아졌다는 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기에. 유준휘 피디가 씩 웃었다.
“그럼 저녁때 한 번 가볼래? 거긴 메뉴가 매일 바뀌거든.”
* * *
한편, 오늘밥집에 도착한 한수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메뉴가 다르다는 말에 기껏 호기심을 가지고 와보았는데.
‘하필이면, 오징어덮밥이야.’
오늘의 메뉴는 오징어덮밥이었다.
한수연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미안한데 오징어덮밥 말고 다른 메뉴도 있을까요?”
“혹시 알러지가 있으십니까?”
깜짝 놀라 이수호의 눈이 커졌다. 한수연은 고개를 가로질렀다.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냥 다른 게 먹고 싶네요.”
“소불고기나 돼지짜글이로 준비해 드릴 수 있는데. 어떤 걸로 하시겠습니까?”
“그럼 소불고기요. 아, 그런데 맥주 먼저 먹고 난 다음에 주세요.”
한수연은 땅콩을 안주 삼아 맥주를 먹었다.
지글지글 끓는 오징어덮밥과 새하얀 쌀밥을 보면서 모두가 감탄하면서 허겁지겁 식사를 할 때였다.
한수연의 시선이 오징어덮밥에 닿았다.
어딘가 그녀의 표정 속에 씁쓸함이 담겨있었다.
“오징어를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아니,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닌데. 그냥…… 오징어덮밥하면 한 친구가 생각나서요.”
한수연이 입을 열면서, 옛날 기억을 회상하듯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 * *
“……컷.”
때는 한수연이 학생으로 단편 영화를 촬영할 때였다.
한수연은 방금 촬영한 장면에 만족하면서 또 생각했다.
‘어쩜 저렇게 연기를 잘하지?’
속으로 감탄하던 한수연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카메라에 있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대학생이었다. 친구한테 건너건너 소개를 받아 아르바이트 겸 단역으로 출연한 남자에게 처음에 큰 기대는 없었다.
클로즈업 된 남자의 맑은 눈을 계속 살펴보던 한수연은 직감했다.
‘나중에 이 사람은 큰 배우가 될 거야.’
명백하게 의도를 이해하는 남자. 어쩌면 자신보다도 더 그 캐릭터를 사랑하고 표현해 내는 남자에게, 한수연은 강한 끌림을 느꼈다.
“오징어덮밥 먹으러 갈까요?”
카메라 밖에서의 남자는 그저 쾌활한 대학생이었다. 남자는 쾌활한 분위기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좋아요.”
도착한 곳은 그가 다니던 학교 근처에 있던 자그마한 오징어덮밥 집이었다.
낡았지만 주인집 할머니의 인심이 좋은 곳이었다.
학교 옆이라 그런지, 주머니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 학생들을 위해서 오징어가 푸짐하게 들어가 있었다.
매콤하면서도 쫄깃한 오징어덮밥.
“여기에 김가루랑 참기름을 넣고 비벼먹으면 더 맛있거든요.”
“정말요?”
꽤 말라 보이는 김정호였기 때문에 한수연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마늘이 듬뿍 들어가서 매콤한 국물 맛이 어찌나 좋던지. 안 그래도 오징어덮밥을 좋아하는 한수연은 붉은 국물에 밥을 싹싹 비벼가면서 오징어덮밥을 해치웠다.
“최고인데요? 오징어도 너무 쫄깃하고. 국물도 참기름이 조금 섞여들어서 너무 맛있어요.”
“그렇죠? 제가 좋아하는 집이라니까요. 마음에 들어하니 다행이네요.”
부드럽게 미소 짓는 김정호를 보면서 한수연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저 사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오징어덮밥이거든요. 오늘 이렇게 맛있는 집을 발견하게 돼서 너무 좋아요.”
“정말입니까? 저도 오징어덮밥을 제일 좋아하거든요.”
남자가 놀란 듯이 말했다.
둘이 잘 맞는 것은 비단 음식 취향만이 아니었다. 본 영화도, 읽은 책도.
어쩜 그렇게 좋아하는 게 똑같은지, 둘은 오징어덮밥집에서 시간 갈 줄을 모르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이도 같았기에 금방 말을 놓았다.
둘은 서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계속 그렇게 지낼 수만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꿈만 같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일이 생긴 건 어느 겨울날이었다.
* * *
“정호야! 놀라지 마. 우리 이번 작품 초청받았어! 상 받으러 오래!”
“뭐?! 정말?”
지역 영화제에 출품한 그녀의 단편 영화는 우수상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렇다니까! 다 네 덕분이야. 오징어덮밥 먹으러 가자. 오늘은 내가 쏜다!”
잔뜩 설레하는 한수연과 달리 김정호의 표정은 어딘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진작 알아차렸다면 좋았겠지만, 수상 소식에 들뜬 한수연의 눈에 그런 김정호의 표정을 눈치챌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는 칸영화제에도 가고 말이야.”
그렇게 평소처럼 오징어덮밥을 먹으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김정호였다.
“다음 영화는 같이 못 찍을 것 같아, 미안.”
“무슨 말이야? 우리, 열 개는 같이 찍을 거라고 말했었잖아. 갑자기, 이렇게 그만두겠다고? 상까지 받았는데?”
“……애초에 나 같은 놈한테 말도 안 되는 일이었어. 그래도 너는 재능이 있으니까 잘 해봐. 나는 너라면 정말 칸에도 갈 거라고-”
그러나 김정호는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야, 너 여태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화가 난 한수연이 테이블을 내리쳤고, 그 바람에 술잔에 있던 소주가 출렁거렸다.
‘믿을 수가 없어.’
김정호의 말에 큰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와 같이 보낸 시간들이 엉망으로 바뀌는 것만 같았다.
실망이 크다는 건 곧 기대가 컸었다는 것. 그 사실을 알기에 김정호는 한수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중얼거렸다.
“……훌륭한 감독이 될 거야. 진심으로.”
오징어덮밥이 점점 식어갔다.
이후로 김정호는 다시 동아리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몇 번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게 다였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떠났다.
가끔 그 친구가 생각날 때가 있었다.
‘만약 계속 같이 일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이미 지나간 일이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 오징어덮밥을 보면…… 그 친구가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피하게 되더라고요. 나중에 그 근처를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사장님이 그만두셨는지, 이미 오징어덮밥이 아니라 다른 집으로 바뀌었더라고요.”
한수연이 씁쓸하게 웃었다.
“……저기, 그런데 역시 소불고기 말고 오징어덮밥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맥주와 땅콩만 먹던 한수연이 드디어 식사를 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징어덮밥?’
“네, 주문은 지금 변경 가능한데…….”
방금 이야기를 모두 들은지라 오징어덮밥을 내놓기 뭐했던 우빈이 괜히 말끝을 흐렸다.
그런 우빈을 본 한수연도 멋쩍게 웃었다.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뭐 이런 거창한 이유보다는…… 그냥, 말하다 보니까 갑자기 억울해져서요. 오징어덮밥이 뭔 죄가 있겠어요?”
어차피 그녀 혼자 이렇게 옛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친구는 세상 어딘가에서 맛있는 오징어덮밥을 먹고 있을 터였다.
“생각만 해도 얄미워요! 그러니까 저도 먹을래요. 그리고…… 냄새도 너무 좋고요.”
아예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더라면 모를까.
쫄깃한 오징어와 매콤한 양념에 비벼먹는 오징어덮밥의 맛을 아는 이상, 계속 코끝에서 맴도는 매콤한 냄새를 거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오늘밥집에서는 손님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는다.
우빈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오징어덮밥 하나, 주문 받았습니다.”
* * *
갑오징어에 사선을 긋듯이 칼집을 넣어주었다. 몸통은 채 썰고 다리는 분리해 준다.
다음으로는 덮밥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줄 채소를 준비할 차례. 양파와 당근을 채 썰고, 홍고추는 어슷하게 썰어주었다.
팬에 식용유를 부어 대파를 먼저 넣었다. 그리고 대파의 숨이 죽을 때즈음에 오징어를 넣어 달달 볶아주었다.
간장과 고추장, 그리고 고춧가루를 넣어주자 팬에 올라간 오징어의 색깔이 순식간에 온통 붉은색으로 변했다.
간마늘까지 듬뿍 넣어주자 알싸한 마늘향이 김과 함께 코끝을 찔렀다.
“양념이 탈 거 같습니다. 불을 조금 줄여야 할까요?”
“오징어는 이 정도 센 불이 좋아. 너무 탈 거 같으면 물이랑 야채를 더 넣어주면 돼.”
그리고 그렇게 오징어덮밥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한 중년의 남자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가게에 들어왔다.
“오! 오늘은 오징어덮밥입니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인데. 저도 하나 주시겠어요?”
남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예전에, 같이 오징어덮밥을 먹으러 다니던 정말 친한 친구가 있었거든요. 그 친구는 이제 유명한 감독이 되었지만요.”
씁쓸한 목소리로 말하는 중년의 남자. 그리고 그런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우빈이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였던 것 같기 때문이었다.
흘깃거리며 한수연을 쳐다보는 우빈을 보고 남자가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왜 그러시죠? 제가 무슨, 이상한 말이라도…… 어어, 억?!”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듯 남자의 몸이 얼어붙다시피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 시선을 느낀 한수연도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듯이 둘의 시선이 한동안 서로에게 머물렀다.
“너너너, 너…… 한수연, 맞지?”
* * *
“많이 늙었네.”
한수연이 장난스레 먼저 입을 열었다.
“그야, 이십 년 만이니까…… 그런데 너는 그대로다.”
“에이, 그대로는 아니지. 여기 이마에 주름도 생기고, 얼굴에는 요즘 기미도 생겼어. 이거, 제거하려면 돈 꽤 든다더라?”
잠시 서로의 근황을 나눈 이후로는 어떤 대화를 해야할지 몰라 둘 다 말을 삼켰다.
둘 사이에 어색한 적막만이 흘렀다.